나의 글쓰기 희망사항

                                                                             이현숙

 

  나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며칠 동안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꿈틀대는 생각들을 살살 풀어내려한다. 한편의 글이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의 씨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두렵다. 마음을 모은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신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출렁거림에 어찌하지 못하고 등 떠밀려 전원을 켠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는 나에게는 희망사항이 있다. 이렇게 쓰고 싶다는 바램이다. 나만의 방식을 살짝 공개한다.

첫 생각을 놓치지 말자. 수필은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만난다. 사물 또는 스치고 지나는 상황들이 사인을 보낸다. 봐달라고, 할 말 있다며 유혹을 한다. 눈이 마주쳤을 때 찌릿 하는 전기가 온다. 그 순간부터 머릿속에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연애하는 기분으로 줄다리기를 한다. 대충의 아우트라인이 잡히고 주제가 나오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서두는 첫인상이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생각한다. 독자를 잡아끄느냐 버림받느냐라는 순간의 결정을 내리는 부분이기에 첫 단락은 줄거리를 연상시키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왜?’ 하는 의문이 들게 쓰려고 한다.

본론 부분은 내가 간직한 이야기를 가볍게 그냥 쓴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잊어버린다. 뒤돌아가서 읽지 않고 그냥 써 내려 간다. 손을 계속 움직이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나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숙제이다. 수필은 사사로운 개인의 이야기로 글을 쓰기에 그냥 내 자신의 넋두리에 머문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버려지는 글이 된다. 읽는 이가 ‘맞아 나도 그랬는데’ 하는 마음에 작은 느낌표를 남긴다면 성공한 작품이 아닐까.

  글도 숨을 쉬어야 산다. 리듬이 필요하다. 문장이 너무 길면 읽다가 지쳐 버리고 숨이 막힌다. 반대로 짧으면 스타카토처럼 탁탁 끊어져 흐름이 잘려 버린다. 문장의 길이를 조절하는 것으로 리듬을 만든다. 한 두 줄 길게 썼으면 다음 줄을 짧게 쓴다. 긴박한 내용일 때는 짧아야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지 않을 까.

그 문장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는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즐기는 단어들이 한편의 글 안에 자주 등장한다. 또 미국에 살다보니 한국말도 미국말도 다 반벙어리 수준이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로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단어의 빈곤함을 느낄 때가 많다.

  무언가가 빙빙 입 안에서 맴돌 때는 사전을 뒤적여 본다. 색다르게, 남다르게 나만의 단어나 표현법을 찾으려하는데 정말 쉽지 않다. 평범하면서도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가치, 색다른 아름다움을 작가의 솜씨로 형상화시켜야 할 터인데 걱정이다.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하기에 그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요즘은 빠름의 시대다. 긴 글은 읽지 않으려하기에 5매 수필도 쓴다. 나는 ‘분재 수필‘ 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다. 짧은 그 안에 엑기스만 골라 넣는 작업은 쉽지 않고, 짧기에 그 안에 사용되는 단어들은 의미가 담긴 것으로 선별해야 하기에 더욱 어렵다.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끔은 인터넷 상에 떠도는 신조어들도 경박스럽지 않은 한에서 사용하는 센스는 어떤지.

  본론을 이렇게 끌어오다 보면 결론부분에 다다른다. 마지막 단락은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끝내기를 한다.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은 연결성 있게 쓰는 게 정석이다. 첫 단락에 메시지를 슬쩍 흘리고 마지막 단락에 못을 ‘꽝’ 박으며 글의 흐름을 연결시키면 멋지다. 그러나 나는 대체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슬쩍 꼬리를 감춘다. 가끔 첫 단락과 정반대로 써서 반전의 느낌을 살리려고도 해본다. 독자가 읽어 내려오면서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 주기를 바란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흘려버린 무언가를 건져주기를, 난 여기까진데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라며 여운을 남긴다.

  글은 완성이라는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필수인 고쳐 쓰기를 해야 할 차례다. 퇴고는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 다시 읽는 과정에서 '새롭게 다시 상상하는 작업'이다. 초고가 완성되면 바로 보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하루 이틀 지난 후 퇴고를 한다. 읽고 또 읽으며 사족은 아깝지만 과갑하게 잘라낸다. 도려내고 오려내어서 다른 곳에 끼워놓는 짜깁기도 한다. 누덕누덕 기워진 글을 계속 보면 이미 머릿속에 굳어진 이미지 때문에 혼동이 되니 접어 두었다가 며칠 더 뜸을 들인 후 열어본다.

  퇴고할 때 프린트를 해서 소리 내어 읽는다. 읽다보면 물 흐르듯 하지 않고 혀가 꼬이는 부분이 있다. 문제가 있다는 알림이다. 불필요한 접두사나 조사들은 살짝살짝 잘라낸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좀 정리하고 나온 가볍고 산뜻함이 느낌이 들게 한다.

제목은 신중하게 오래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작명소에 가는 이유가 이름에 그 아이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 아닌가. 글의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고 내용과 상관없는, 불분명한 제목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이외수 선생님은 TV에 나온 그를 보고 동네 꼬마가 ‘할아버지 이제 떴네’ 하는 말에 <글쓰기의 공중부양>이라는 멋진 책 제목을 썼다고 한다.

  시간이 날 때면 나는 백업 노트를 뒤적인다. 첫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또는 평소 쓰고 싶은 주제나 소재가 떠오를 때마다 아이디어를 적어 둔 보물상자이다, 번개처럼 지나가는 기억도 주제 목록에 첨가될 수 있다. 삶의 경험들을 삭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끔 노트든, 머릿속이든 아님 컴퓨터의 파일이든 단 한 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다시 눈이 맞으면 반가워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 끄적거리게 된다. 백업이다. 소중한 재산이고 보물이다.

  특히 타국에서 여러 민족들과 어울려 살기에 색다른 소재들을 만난다. 그 안에서 겪고 섞이는 과정에서 인생의 달고 쓴 진한 맛을 그려 낼 수 있는 것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우리들의 장점이다. 모국어로 작품을 쓴다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희망사항들을 새기며 열심히 쓰련다.

  내 글쓰기 희망사항의 바탕에는 진실을 심으려 노력한다. 나의 삶과 자신의 부족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단 한사람이라도 내 글을 읽고 공감대를 느끼고 문뜩 어느 날 한 줄이라도 떠 올려 준다면 하는 희망사항을 품어본다.

     지금도 이 글을 고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