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마당

Articles 182

 

 

 

치지도외(置之度外)한 인생

유숙자

    경진 庚辰생 용띠인 나는 백룡의 해에 태어났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은 인간을 뜻한다고 한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신의 선물인 여의주를 입에 물어야 한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용띠의 상징은 인간에게 이상과 꿈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라는 암시적 의미가 아닐까 하는 나름의 생각을 해본다.

    누가 내 띠를 물으면 용띠입니다. 한다. 높은 띠이군요. 상대방의 말이다. 글쎄요. 높은 띠인지는 모르겠으나 출생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띠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는지 모르겠으나 건강하게 태어나기는 했는데도 하마터면 베넷 젖 한 모금 빨아보지 못하고 스러질 뻔했다.

 

    해방 전, 그때는 산파가 아기를 받던 시절었는데 아기가 태어나고 산파의 처치 미숙으로 어머니는 급히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다. 

    병원에서 의사의 촉진을 받으며 위급상황에서 벗어난 어머니가 ‘아기는?’하고 외치셨단다. 그때까지 아버지, 이모, 주변 사람이 산모에게 만 신경을 썼지, 빈집에 방치된 아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산모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뿐 핏덩이 같은 아기에게 관심 가질 경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모가 황급히 집으로 향하며 거의 두 시간여 방치한 아기가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걱정과 죄책감 속에 집안으로 들어서니 안방에 아기가 없더란다. 이모는 혼비백산하여 갓난아기란 것도 잊고 방마다 찾아보았는데도 아기가 없자 기진하여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더란다. 사방을 둘러보니 책상 밑으로 깊숙이 밀쳐진 아기가 포대기에 싸인 채 잠들어 있더란다. 누군가 산모를 움직이느라 걸리적거리니 밀어 놓았던 것 같다. 신비스럽기까지 하다는 용띠 나는, 명이 길어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다.

 

    1950년 6월 초, 개성 친가에서 작은아버지가 서울에 오셨다. 맏아들인 아버지께서는 공부에 뜻이 있어 일찍이 부모님 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대소사를 의논할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구경을 겸하여 몸소 상경하시기도 했지만, 큰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작은아버지를 상경시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번에 둘째 손녀인 나를 보고 싶다 하셔서 방학 전이지만 잠시 개성을 다녀와야 했다. 환갑을 넘기기가 힘들었던 그 당시에 육십 중반의 할아버지 말씀은 곧 법이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언니와 함께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한 달가량 머물며 사촌들과 미꾸라지도 잡고 산딸기도 따 먹으며 즐겁게 지내다 왔는데 이번에는 방학도 되기 전에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았으니, 상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왕세손이 된 기분이었다.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 댁 삼포 밭과 제반 일들을 의논하고 서울 구경을 하신 다음 떠나게 되었다. 나는 언니가 싸주는 가방에 몇 권의 책을 넣고 학예회 때 입었던 무용복도 슬쩍 넣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춤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였다. 

6월 중순, 작은아버지와 함께 전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표를 사고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개성행 기차를 타게 되어 역사 안 의자에 앉았다가 시계탑 근처를 서성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저만치서 헐레벌떡 숨이 곧 멎을 것 같은 모습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작은아버지와 내 앞에서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한 체 ‘아주버님, 안 되겠어요. 얘는 무서움을 잘 타서 밤에 꼼짝 못 해요. 큰애가 방학하면 그때 같이 보낼게요. 아버님께 잘 여쭈어 주세요’. 작은아버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어머니는 내 손을 낚아채듯이 움켜쥐고 냅다 큰길로 달리셨다. 시골집 문밖의 화장실을 핑계 대었으나 어머니는 어떤 예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열흘 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용띠는 가상의 존재이기에 살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는 별로 없었다. 일상 이야기 속에서조차 놀림이나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다만 용띠인 내가 태어나자마자 치지도외한 인생이었던 점, 하마터면 이북 에미나이가 되어 부모 형제를 그리며 송악산 봉우리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평생 눈물짓다 망모석 望母石이 되지 않았을까.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견지명이 있었던 어머니 덕분에 생이별을 모면한 감사는 다시 태어난 감격과 맞먹는다.

    여의주를 입에 물지 못해 하늘로 승천하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마음과 풍성한 꿈과 높은 것을 지향하는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2025)

 

 

 

 

 

No.
Subject
Author
182 [그린에세에] 여자이기를 포기하다 new
유숙자
Sep 24, 2026 2
        여자이기를 포기하다  유숙자 외출할 때 세련미를 더 해주는 마지막 완성은 신발이 아닌가 싶다. 화장에서부터 옷매무새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다 하더라도, 어떤 신발을 신느냐에 따라 총체적 미적 감각이 달라진다. 하이힐과 플랫슈즈에 따라...  
181 [재미수필] 백조의 노래 3
유숙자
Aug 08, 2026 374
      백조의 노래                                                                                                                 유숙자    공연을 마친 후, 텅 빈 객석을 바라볼 때 허탈감을 무대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더욱이 그 공연이 마지막 날...  
180 [테마수필] 음악에 살으리랏다 2
유숙자
Jul 01, 2026 554
  음악에 살으리랏다 유숙자 음악이 우리에게 불러 일으키는 감동과 영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음악은 우리를 일상적 괘도에서 해방시켜주고, 지친 영혼을 치유하며, 심리적 안정을 준다.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고, 연주를 관람하면서 감동의 눈물과 박...  
179 [퓨전수필] 유채꽃이 필 때 2
유숙자
Apr 22, 2026 1390
      유채꽃이 필 때                                                                                                                                                                     유숙자                                                  ...  
178 [그린에세이] 다우닝가 10 번지(10 Downing Street) 2
유숙자
Mar 10, 2026 1255
      다우닝가 10번지 유숙자 노란 수선화가 살포시 꽃대를 올리는 봄이면 나는 그곳이 생각난다. 겨울에도 잔디가 파랗고 이른 봄부터 노란 수선화가 피며 안개가 꿈처럼 피어오르는 곳.  1980년 남편의 근무지가 영국으로 옮겨지면서, 우리 가족은 런던 북...  
177 [재미수필] 2악장의 삶
유숙자
Nov 25, 2025 1922
  2악장의 삶 유숙자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몇 가정을 초대했다. 조촐한 식탁을 마련하고자 하니 오랜만에 만나 담소를 나누자 했다. 라카냐다 친구 집 가는 길은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져 운치가 있다. 차를 세우고 현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들린 음악,...  
[재미수필] 나의 띠 이야기 치지도외(置之度外)한 인생
유숙자
Nov 25, 2025 1972
      치지도외(置之度外)한 인생 유숙자     경진 庚辰생 용띠인 나는 백룡의 해에 태어났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은 인간을 뜻한다고 한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신의 선물인 여의주를 입에 물어야 한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용띠의 상징은 인간...  
175 [그린에세이] 내 마음의 푼크툼(punctum)
유숙자
Jul 11, 2025 2403
    내 마음의 푼크툼(punctum) 유숙자           불이 밝혀지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불빛이 밝혀진 창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표시이다. 불빛은 우리에게 따스함 교감 희망을 암시한다. 반면 불 꺼진 창은 정적 단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해마다 산불로 ...  
174 [퓨전수필] 새해 바람 4
유숙자
Jan 22, 2025 2170
  새해 바람                                                                                                                                                           유숙자     새해를 맞는 각오는 누구나 각별하다. 동쪽 하늘에서 서광이 비칠 때...  
173 [재미수필] 정리 情理 4
유숙자
Dec 17, 2024 2439
    정리 情理                                                                                                                                                유숙자      우편함을 열 때면 마음이 설렙니다. 요즘은 손 글씨로 쓴 우편물이 드물기에 ...  
172 [그린에세이] 그립게 서럽게 물든 세월 2
유숙자
Sep 23, 2024 2435
  그립게 서럽게 물든 세월 유숙자 비가 내린다. 모처럼 내리는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내리흐른다. 세찬 바람에 자지러질 듯 흔들리는 나뭇잎, 세월을 갈마들며 물들고 잎 진 사이로 비를 좋아하는 친구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금방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들어...  
171 [퓨전수필] 봄처럼 살고 싶다 2
유숙자
Apr 22, 2024 2259
  봄처럼 살고 싶다 유숙자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눈이 쌓여 있어도 햇살은 어딘지 모르게 봄기운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매일 아침 걸을 때 보면 산은 날이 다르게 파스텔을 문질러 놓은 듯  희뿌옇게 보여 멀지 않아 겨울이 꼬리를 감출 것 같다. 도시의 가...  
170 [재미수필] [Chungshin] [한국여성문학인회] 달빛정원 5
유숙자
Dec 25, 2023 2556
  달빛정원   유숙자 하루의 시작은 음악을 여는 손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아침 창가에서 즐기는 한 잔의 커피와 음악은 마음에 여유를 주고 자주 듣던 소품이라도 새로운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하늘 보기를 좋아한다. 창공을 바라보고 ...  
169 [재미수필] 낙엽이 된 명성 4
유숙자
Dec 25, 2023 2376
  낙엽이 된 명성                                                                                                         유숙자   플라시도 도밍고가 무대에 선지 60년이 되었다. 1980년부터 나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을 자주 보았고 미국에 이주해...  
168 [국제펜문학] [재미수필] 그는 나의 음악이었고 나는 그의 노래였다 6
유숙자
Oct 19, 2023 2377
    그는 나의 음악이었고 나는 그의 노래였다 유숙자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노투르노(Notturno D. 897)는 보파드의 추억을 잊지 못해 수필로 그린 작품이다. 그 수필을 우연한 기회에 읽고 ‘노투르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한 분을 어느 모임에서 ...  
167 [재미수필] 간극​​​ 間隙 2
유숙자
Jan 13, 2023 2812
  간극​​​​​​間隙 유숙자                                                                                                                          어느 해 여름  화분을 사러 홈디포에 갔다. 꽃이 즐비하게 늘어선 꽃길을 지나는데 때아닌 토마토 모종...  
166 [재미수필] 바(Barre)를 잡으며 4
유숙자
Jan 13, 2023 2613
   바(Barre)를 잡으며 유숙자  신록의 계절 5월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더욱 생기로운  5월, 내 마음에도 작은 불씨 하나 당겨졌다. 마치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놀랍게 아름다운 달  5월에, 모든 꽃봉오리가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  
165 [재미수필] 바다에 빠진 크루즈
유숙자
Feb 22, 2022 2611
  바다에 빠진 크루즈    유숙자 2020년을 맞으며 숫자의 나열이 예뻤다. 내 인생도 한 고개를 넘어섰다. 그 숫자도 예뻤다. 올해에는 여행 스케줄이 두 개가 잡혀 있어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5월에 떠날 예정인 2주간 북유럽 크루즈  예약을 20...  
164 [미주한국일보] [재미수필] 연극은 이미 끝이 났는데 1
유숙자
Feb 22, 2022 2722
  연극은 이미 끝이 났는데 유숙자 어머니! 유월입니다. 가슴을 확 열어 놓고 하늘과 땅을 향해 목청 돋우어 부르고 싶은 이름 그리움입니다. 이슬이 밤새워 풀잎을 닦듯이 이런 밤이면 누군가 찾아가 마음 기대며 실컷 울어 어머니에게로 향한 샘 줄기 같은 ...  
163 [미주펜문학] 여름에 들리는 가을 소리 4
유숙자
Jul 03, 2021 2582
  여름에 들리는 가을 소리 유숙자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구르는 소리가 가을을 연상케 한다. 일 년 중 가장 혈기방장한 계절 7월. 갈맷빛 녹음이 우거져 온 세상이 푸르러야 하건만, 올해는 고온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빛을 잃고 시들어가고 있다. 나뭇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