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들의 몫 

 

                                                                 [마이블루메] 미니 핸드타이드 모음 (장미 한 송이 포장)

                                                                      이현숙

 

 

    니콜이 묻힌 공원묘지이다. 남편 직장동료인 찰리의 틴에이저 딸이 자살을 한지 일 년 되는 날이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해 잔병치레가 잦았다. 학교보다는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보니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증세가 심해졌다. 혼자만의 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나오려 하지 않아 카운슬링을 받고 우울증 약도 복용 중이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일 년 전 그날. 출근하려다 딸의 방문을 연 바버라는 싸늘한 낯선 공기가 그 방안에 가득 찬 것을 느끼며 가슴이 철렁했다. 여기저기 뒹구는 빈 약병들이 간밤에 일어난 일들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단다.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다.

  저만치 찰리의 가족들이 보인다. 꽃다발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무겁다. 그들과 간격이 좁혀질수록 슬픔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듯하다. 첫마디를 어찌 꺼내야 할지 입안에서 맴도는 여러 말이 갈팡질팡 길을 잃는다.

   찰리와 그의 아내 바버라 그리고 찰리의 노모 마리아나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준비해간 꽃을 니콜의 묘비명 위에 오려 놓고 잠시 그녀와 가족을 위해 기도를 했다. 얼굴을 가린 바버라의 손가락을 타고 슬픔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리움의 진액이 땅으로 스며들어 니콜에게까지 전해지리라. 바버라, 울어요. 그래도 울 수 있어 다행이에요. 힘들지 않은 척 안으로 삼키면 병이되니 자꾸자꾸 끄집어내세요. 다시 채워지더라도 덜어내세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을 잃었으니 마음이 오죽 아플까요. 어떤 말로 감히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소에,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하나님은 없는 게 낫다'고 절규한 것도 스물여섯 살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였다. "내 수만 수억 기억의 가닥 중에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이 구절을 읽으며 자식을 앞세운 애통함이 느껴져 나도 한참을 마음이 아렸다. 자식의 얼굴빛이 달라져도 걱정이 되고, 병이 나면 대신 아파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필요하다면 몸의 일부라도 내어 준들 무엇이 아까울까. 그런 자식이 먼저 떠났으니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것이다.

   하트모양을 한 핑크빛 풍선에는 PRINCES라고 새겨져 있다. 그 위에 누군가 삐툴삐툴한 글씨체로 BEAUTIFUL이라 써 놓았다. 마리아나는 당신이 내 손녀딸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 아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주님인지 모를 거라고 했다.

   작년 이맘 때, 니콜의 만 16살(Sweet Sixteen) 생일잔치를 준비 중이었단다. 소녀에서 숙녀가 된다는 의미로 마치 결혼식을 치르듯 하얀 드레스에 들러리를 세우고 잔치를 하는 것이 미국의 오랜 풍습이다. 파티를 열어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려고 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죽기 전 날에도 드레스를 선물해 준다는 할머니의 약속에 잡지책을 보며 어울리는 디자인을 찾느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며 마리아나는 아직도 눈에 선한 표정이다. 허무하게 갈 줄 알았다면 멕시칸 식으로 낀세녜라(Quinceñeara스페인어: 만 15세 생일잔치)를 해 줄 것을 지나고나니 후회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아쉬움이 말끝에 꼬리를 단다.

   찰리는 직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처리하지 못해 쫓겨날 뻔 했었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고, 누나를 잃은 열 살짜리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노력하는 중이란다. TV를 보다가 니콜이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이 나와도, 음식을 먹을 때도, 지나치는 또래의 여자아이를 볼 때마다 담담하게 유지하려던 마음이 맥없이 무너져 버린다지만.

   그녀가 오죽했으면 스스로의 삶을 끊었을까.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었겠지. 만나본적도 없는 니콜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안타깝다. 그녀는 지금 편안할지 모르나 남겨진 가족들은 그날의 놀램이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누구의 자식으로, 누구의 친구로의 위치가 있기에 모든 생명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 나 하나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무슨 상관있냐는 변명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자신이 이겨내야 할 고통을 남겨진 이들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짓이다. 니콜! 참고 견디며 이겨내야 했어. 깊은 슬픔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족들이 보이지 않니.

   할머니는 집에 혼자 있는 손자가 걱정된다며 ‘내가 남아서 우리 공주랑 더 놀아줄 거니까 이제 그만 가라’고 찰리 부부를 쫒는다. 딸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보는 것이 마리아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또 다른 슬픔이다. 어머니의 마음이기에.

   눈물에 젖은 손으로 키스를 담아 니콜의 묘비명에 살포시 얹는 바버라. 그녀의 등을 찰리가 쓸어준다. 꽃을 다시 정리하는 마리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도 발길을 돌린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덜어내도 다시 채워지는 슬픔은, 잊으려 할수록 더 깊어지는 그리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남겨진 이들이 몫이다. 발걸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