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을 건너 나에게 오다

 

이현숙

 

차고에 삐뚤빼뚤 포개져 깊은 잠에 빠진 상자가 마음에 걸렸다. 30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짐이다. 이리저리 쌓인 상자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 거미줄과 먼지로 겹겹이 포장되어 문에서 가까운 것부터 밖으로 내놓았다. 오래된 전기 요금 고지서와 시어머니가 받은 월급 지급서 뭉치에 이미 삭아 힘을 잃은 고무줄이 눌어붙었다. 그분이 일했던 산타페 철도회사(Santa Fe Railroad) 상표가 박힌 금이 간 접시와 얼룩진 찻잔도 있다.

선반 구석에 자리 잡은 상자는 무거워 겨우 내렸다. 열어보니 디즈니사 어린이 동화책과 한참 지난 내셔널 지오그라프 잡지들이다. 그 사이에 손바닥만 한 책이 웅크리고 있었다. 두툼한 누런 표지 가운데 자리한 초상화와 서명이 낯설지 않다. 이럴 수가.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마크 트웨인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서재로 가서 찬찬히 들여다봤다. 표지를 넘기니 그의 대표작인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톰과 허클베리 핀이 낚싯대를 둘러맨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나를 본다. 그가 필명을 짓는데 아이디어를 준 증기선이 연기를 뿜으며 강물을 가르는 그림이 연필로 스케치한 듯 그려져 있다.

왕자와 거지, 첫 장에는 대형 거울에 누더기를 입은 거지와 왕자 복장을 한 두 소년이 마주 보며 서 있다. 뒷장에는 본명인 사무엘 클레먼스, 1909년에 인쇄되었다고 쓰였다. 본문을 넘기는데 종이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얇았다. 쿰쿰하고 쌉싸름한 냄새가 났다.

 

마크 트웨인. 그는 미국 문학의 아버지 혹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린다. 나는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 그가 쓴 작품을 아이들에게 구연동화로 들려주었다. 두 아들에게도 읽어주며 같은 미국 땅이니 그가 살던 집을 가고 싶다고 별렀다.

몇 년 전 인문학 기행 팀을 따라 오랫동안 그리던 코네티컷주 하드퍼트에 있는 마크 트웨인집을 다녀왔다. 빅토리아 양식인 붉은 색 3층 건물은 환상적이었다. 직사각형 건물에 육각형 탑을 붙였고 부채꼴 모양도 한쪽을 차지 했다. 팔각과 원추형 지붕이 굴뚝과 어우러져 어디에 촛점을 두고 사진을 찍을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중에 내 눈길을 잡은 장소는 거실 한쪽에 팔각형 유리 공간으로 만든 온실이다. 거실에서 추운 겨울 눈이 오는 날에도 활짝 핀 장미를 볼 수 있게 꾸몄다. 그다운 기발한 아이디어로 당시에도 유명했단다. 그곳에서 자녀들과 자신의 작품인 <왕자와 거지>로 연극을 꾸며서 즐겼다. 온실은 왕실의 정원이고, 본인은 거지 왕자를 돕는 마일드 핸튼경 역할을 할 정도로 그 스스로도 사랑했던 작품이다.

왕자와 거지는 처지가 바뀌는 바람에 기막힌 모험을 겪는 두 소년의 이야기다. 에드워드 왕자와 거지 소년 톰은 한날한시 태어났다. 톰이 궁전에 가서 평소 동경하던 왕자를 만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왕자는 거지의 삶에 흥미를 느껴 옷을 바꿔 입고 궁 밖으로 나가고 그 빈자리를 거지가 대신한다. 에드워드와 톰, 사람들은 바뀐 옷차림만 보고 그들을 평가하며 대우했다. 그 속에서 두 주인공은 엉뚱한 해프닝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현실적인 괴리, 인간 본성에 대한 다양한 속성을 파헤쳤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정장에 곱슬머리로 범상치 않은 외모처럼 해학과 풍자 안에 가시를 품은 자신만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그려냈다. 핼리 혜성이 지나갈 때 태어나서, 혜성이 다시 지나갈 때 세상을 떠날 거라며 자신의 마지막을 예언하며 수많은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숨결이 깃든 집을 다녀오고 난 후에도 문득문득 온실 가운데 있는 작은 분수가 날린 물줄기에 방울방울 맺힌 무지개가 떠오르고는 했다.

책장에 꽂힌 다른 책들과 어울리지 않아 책상 위 작은 선반에 세로로 세워 눈에 띄게 모셔놓았다. 요즘 나온 책과는 달리 그동안 거쳐온 시간을 품고 있기에 소중하다. 몇 사람의 손길을 스쳤을까. 그중에 나처럼 반가워한 사람이 있을까. 시어머니의 오래된 물건 속에서 찾아낸 보물이라는 의미도 있다. 손주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인지, 본인 좋아해서 인지, 글을 쓰는 며느리를 얻을지 상상이나 하셨는지 물어볼 수 없어서 아쉽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담고 바라보니 마크 트웨인 온실에서 본 무지개를 다시 만난 듯했다.

 

110년의 시공을 넘어 꿈처럼 다가온 마크 트웨인. 세월을 넘어 인종에 구별 없이 지금도 사랑받는 작품을 쓴 필력이 부럽다. 요즘처럼 하고픈 말이 머릿속에 빙빙 맴도는데 그 실마리를 집어내지 못할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끙끙 앓는 소리를 낼 때 무언가 영감을 주지 않을까. 과거에서 현재로 온 책은 나에게 행운을 가져오는 부적, 럭키 참(lucky charms)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꿈속에서라도, 그가 못다 한 얘기를 내게 조곤조곤 전해줄지도, 혹시 모를 일이지. 책상 앞에 앉으면 맨 먼저 그를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