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방 발표 소개>
오렌지카운티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의 공부방인 오렌지방은 전체 재적 인원은 열 다섯 명이나 이번 발표에는 아홉 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발표를 대면으로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에 글로 진행하는 방법을 모색해보았습니다. 어떤 상황을 설정하여 그에 맞는 가족의 배역도 정하고 정황을 지켜보는 각각의 마음을 글로 표현해 보는 상황극 입니다. 의논 끝에 결정된 상황은 치매 노모를 바라보는 가족의 마음 입니다. 어머니는 직장 생활을 하는 큰 딸의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20년을 희생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가족의 돌봄을 받아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본인은 물론 큰 딸과 사위, 큰 아들과 며느리, 막내딸, 손자, 손녀에 이어 옆집 여자까지 등장하여 그들의 심정을 표현하는 고백의 수필입니다.
수필로 하는 상황극. 이것은 우리 오렌지방에서 최초로 시도해 보는 것인데 앞으로 수필의 한 장르가 되어 수필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변해가는 어머니 (큰 딸 이희숙)
친정어머니와 함께 지낸 지가 어언 22년이다. 나는 큰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남동생이 둘, 여동생이 둘이었던 우리 가족은 평범하지만 다복했다. 은퇴하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맏딸인 내가 서울교육대학으로 진학했고, 졸업한 후 교편을 잡으며 가계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이주할 때 친정어머니는 의지하던 딸을 떠나보내는 상심이 크셨을 것이다. 오 남매를 희생과 정성으로 양육하고 교육하신 결과 자녀들은 명문대학과 좋은 직장에서 일하며 각기 가정을 꾸려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동생의 초청으로 태평양을 건너 오셨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 집으로 오셔서 맞벌이로 바쁜 나의 자녀를 길러주셨다. 어머니는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친구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적응을 잘하셨다.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여 집을 떠난 후로는 노인대학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양로센터에도 가서 시간을 잘 활용하셨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갔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왔다.
그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참고 참았던 아픔이 90줄에 접어들면서 우울증으로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며 성격도 변했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식욕도 떨어지고 매사에 불만을 표하셨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이 세어지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우울증약도 부작용 때문에 드시지 못했다. 게다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과거의 기억은 또렷하게 생각해 내면서도 금방 들은 이야기는 기억을 못 했다. 부엌의 가스 불도 끄지 않고 현관문도 열어둔 채로 들락거렸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나는 걱정이 되어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라고 자꾸 부딪혔다.
어머니를 양로병원으로 모셔야 하지 않을까 큰 동생과 의논을 하긴 했지만, 새로운 환경에 가면 치매가 더 심해질까 봐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큰 아들 집에 가서도 한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불안해하신다. 식사도 안 하고 우리 집으로 오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모셔보리라 마음먹는다. 어머니가 기억의 끈을 꼭 붙잡아 천천히 진행되길 바랄 뿐이다.
장모님 행복 하시죠. (큰사위 임지나)
아내와 함께 양로병원을 다녀왔다. 입구의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들어가니 훤하게 가로지른 복도 끝으로 널찍한 뜰이 보였다. 건물이나 주위 환경은 여느 주택가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햇볕이 잘 드는 쾌적한 곳이었다. 이 곳은 사실 양로원과는 좀 다른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사는 곳이다.
직원이 시설을 보여주었다. 이곳이 얼마나 현대적이며 좋은 환경이며 어떤 서비스를 하는지 소개하는 동영상도 보여주었다. 복도에서 서성대는 노인들은 아내와 나를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한 노인이 달려오더니 살려 달라며 내게 매달렸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자 간호사가 건장한 두 남자를 데려와 노인을 떼어내 데리고 갔다.
아내는 집으로 오며 시종 눈물을 흘렸고 나는 아내를 그저 곁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 금이 간 듯,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다가오는 어둠을 응시했다. 얼마 전부터 장모님한테 치매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내는 2남 2녀 중 장녀였다. 공부를 잘해서 중 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대학도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삼년 째 되던 해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우린 결혼했다. 결혼식 때 장모님은 줄곧 눈물을 흘렸다. 나무와 가지처럼 붙들고 엉켜 살던 장모님이 아내를 보내며 쓸쓸하게 내리깔던 그 젖은 눈. 왠지 죄인처럼 느껴졌다. 장모님은 그 쓸쓸함마저도 자신의 몫이란 듯 신혼여행을 떠나는 나와 아내의 손을 포개 잡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한다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그래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아내에게 미안했다. 우리집 부엌을 떠날 겨를이 없었던 장모님은 나는 괜찮으니 직장일에 최선을 다 하라고 아내를 타 일렀다.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결심을 했다. 장모님이 치매기가 있다고 꼭 요양병원으로 가시란 법은 없다. 사위도 자식인데 왜 그래야하는가. 우리 아이들도 외할머니가 가까이 있기를 바랄 것이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운다.
어머니의 텃밭 (큰 아들 조성환)
큰누나에게 전화가 온 날은 심란하다. 늘 어머니에 관한 일로 마음을 긁어놓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나는 쟁반 깨지는 듯 한 된 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가, 로부터 시작되는 내용은 한결같았다. 엄마가 욕실에 물을 틀어 놓고 잊어버려서 온통 물난리가 났다든지, 공연히 빈 냄비를 올려놓고 가스 불을 켜 놓아 불이 날 뻔했다는 내용 같은 것이었다. 누나는 나, 못 살아 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아흔 살도 중반에 접어든 어머니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누나 집에서 사셨다. 어머니를 누나 집으로 불러들인 것은 누나였다. 외손주 셋을 제 어미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던 어머니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더는 할 일이 없어지자 시나브로 기력이 쇠잔해지셨다. 구순으로 접어들면서 노망기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해들 거듭할수록 심해져 급기야 치매기마저 보였다. 그나마 잘 다니던 양로센터가 팬데믹으로 문을 닫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음전하던 어머니의 고집을 받쳐주던 분별력과 사람의 심안을 꽤 뚫어보던 지각이 고집만 빼고 다 사라졌다. 그런 모습은 자식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는가.
심신이 피폐해진 누나는 양로병원에 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몇 번인가 진중하게 의논한 누나와 나는 어머니를 양로병원에 모시는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몇 군데를 답사했다. 모든 시설과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훌륭했다. 집에서 싫은 소리 들으며 수탉 싸우듯 깃을 세우고 사는 것보다야 백번 나아 보였다. 다만 펜데믹 기간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 철저히 룸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상황이 나아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양로병원이라는 말이 나오자 한국과 타주에 사는 막내 여동생이 대번에 마뜩찮아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고려장이네, 도대체 큰오빠는 뭐 하는데, 하고 대들었다. 누나는 동생들을 설득하고 달래고 어르다가, 너가 몇 개월만이라도 모셔봐라 이 생각 없는 것아. 끝내 버럭 거리고 나서 한참을 혼자 울었다.
나는 동생이 말한 ‘고려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노망이 든 아버지, 어머니를 지게에 둘러업고 얼마간의 곡식을 준비해서 울면서 산을 오르던 전설 같은 그때의 자식 심정을. 어린 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을 보며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싶었고 사람의 자식이 천륜을 팽개치는 듯한 행위가 우리 조상의 역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사람들은, 망령 든 노인은 살아 있는 사람의 삶과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는 격리할 수밖에 없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듯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망이 깊은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도 판단할 수 없다. 깊이 생각해보면 선조들의 삶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몽테뉴가 그랬다지. 삶의 효용은 얼마나 오래 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지로 결정된다고. 굳이 몽테뉴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100세 시대의 허울이 얼마나 무망한지를 느끼고 있다.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불쑥 장수 시대를 맞은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뒤뜰 텃밭에서 호미로 파밭을 고르신다. 기력이 쇠했어도 뒤뜰에 나가 있으면 얼굴이 맑고 밝다. 서슬 퍼런 대파 줄기가 파랗게 젊은 시절의 어머니 같다.
창문 밖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디 살아계시는 동안 어머니의 면모를 잃지 않고 함께 살 수 있기를 빌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죄송하다 (맏 며느리 권조앤)
이민 온지 삼 년 만에 시부모님을 한국에서 모셔와 몇 년을 한 집에서 살았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직장 생활을 하는 큰 시누님네 집으로 이사를 하셨다. 맏이인 우리와는 상의 없이 하신 일이다. 처음에 내가 뭘 그리 잘못해서 우리와 상의도 안하고 가셨느냐고 울었다. 어머니는 미리 얘기하면 계속 함께 살자고 할께 뻔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래서 큰 딸네 집에 계시니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서 하루를 함께 하는 것으로 생활을 계속 했다.
시어머니는 먼지 냄새가 난다며 청소를 하고, 음식도 절대 냉장고에 일주일 이상 저장을 안 하시고 싱싱한 것을 사서 알뜰살뜰 사는 완벽 주의자였다.
워낙에 털털한 맏며느리라 설거지도 맘에 안 드는지 나에게는 일을 안 시켰다. 며느리와 아들을 위해 언제나 당신이 식사준비를 했고 나는 일주일 동안 밀린 수다만 떨면 되었다. 이웃하고 왕래를 안 하는 어머니는 오로지 내가 친구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침에 방문하면 밤늦게까지 어머님 젊었을 적 얘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한 듯 살아왔다.
그런 어머니께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꾸 도둑을 맞는다는 얘기를 하시더니 나중에는 베란다를 어떤 남자가 타고 올라와 성폭행을 하려고 했다는 얘기, 성당 갔다 오니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와 쌀통을 훔쳐갔다는 얘기 등 끝없이 피해를 당했다는 하소연이었다.
하루는 아들이 엄마 도둑은 없어요. 누가 엄마를 강간하노. 아이다. 엄마 정신 차려라. 하니까 갑자기 눈에 푸른빛을 발하며 내말을 왜 안 믿노. 하면서 아들을 마구 패기 시작 했다. 고스란히 맞아주는 남편이었다. 평소에 아들이 가면 얼굴을 쓰다듬고 얼굴만 봐도 행복하다고 했던 어머니였는데 그 날은 딴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우리가 어머니를 모셔야 겠다고 했다. 힘들겠지만 그게 맏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막내 시누이는 타주에 살고 큰 시누님은 엘에이 있지만 직장인으로 사느라 바빴기에 그나마 내가 전업 주부라 자주 찾아뵙고 도움을 주었다.
언제나 단정했던 어머니가 흐트러질 때 쯤 35마일 떨어져 사는 우리가 매일 찾아보게 되었다. 가게는 서로 교환해 일을 하며 지내는 동안 우리도 지치기 시작 했고 차라리 우리 집에 오시게 하자며 의논을 했다. 그러나 이제 치매까지 오기 시작한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기에 남편은 시누님과 함께 양로병원 운운 하며 전전긍긍이다.
기력이 있는 동안 자식을 위해 새벽 4시에 묵주를 돌리고 시계처럼 아침운동, 식사시간을 지키며 살던 어머니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조 여인같던 어머니를 며느리로서 한 발짝 멀리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나는 미안하고 죄스럽다.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막내딸 이현인)
이민 후에 오빠는 친정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하였다. 몇 년을 오빠 집에서 지내시다가 어느 날 직장 생활을 하느라 힘이 든 언니 집으로 가셨다. 아이들이 모두 자라 둥지를 떠나고 이제는 고생을 면했나 했는데 요즘 들어 어머니가 조금 이상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직장의 스케줄을 조정하여 뵈러 왔다. 우리를 위해 긴 세월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비행기 안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 번도 우리 집에 모시지 못한 후회도 밀물같이 쓸려 내려와 내 마음을 후려쳤다.
언니와 형부가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어머니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가보다.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어머니는 요즈음 부쩍 방에 두었던 물건이 다 없어졌다고 우기신다고 한다. 어머니를 양로병원에 모시자는 의견이 있으나 나는 결사반대했다. 어머니를 모실 도우미를 구하면 내가 모든 비용을 치르겠다고 했다. 홈케어의 단체를 통하면 집 근처의 도우미를 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언니가 직장에서 돌아올 때 까지 하루에 여섯 시간씩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식사를 챙겨 드리면 되는 일이다.
가끔 어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어머니 옷장에 있는 옷을 가져가고, 밤에 잘 때는 형부가 들어와서 자는 모습을 지켜보니 무섭다고 하소연을 하셨다. 어머니 영혼의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마음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쇠약해진 어머니의 정신이 믿었던 사람까지 의심하고 환상을 보는 듯했다.
주치의와 통화하였다. 아마도 방광에 염증이 있으면 치매 초기 증상이 온다고 하니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모시고 있는 것도 힘들 텐데 언니에게 시간을 내어 병원까지 가서 검사를 받아 보라는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내가 일주간의 휴가를 내고 비행기를 타고 어머니께 내려왔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시는 어머니를 돌보고 휠체어로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언니와 형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들을 키우고 손주까지 정성스레 길러 주신 어머니를 양로병원에 보내드릴 수 없다고 우겼다. 우리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 가족을 위해 당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신 어머니시다. 모두가 힘겹지만, 우리 가족이 모셔서 그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고 식구들을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언니와 형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치매 할머니와 어머니 (손자 이종운)
직장 생활을 접고 로스쿨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집에 간다. 빨리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방학 첫날 항공기를 탔다. 마중 나오신 아버지가 “할머니 치매가 더 심해져 엄마, 이모, 삼촌이 모두 많이 지쳐 있다.“라고 하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 손을 부여잡았다. ”할머니! 손자가 왔어요!“ 외쳤다. 표정이 없는 할머니는 ”뉘시더라!“ 하셨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생각과 몸이 굳어버렸다. 울컥 목이 메었다. 저만치 비켜 서 계시던 어머니가 다가와 나를 감싸 안았다. 엉엉 울고 싶었다. 차라리 외면이라도 하려는 듯 어머니는 말씀이 없고 할머니는 여전히 무표정 그대로이셨다.
할머니는 배려심이 많고 너그럽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바늘잎처럼 날카롭고, 까칠한 데가 있는 분이셨다. 쌀이 지천으로 나는 호남평야 ‘들 당리‘에서의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위해 대문 밖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의 할머니는 어린 나를 불러 “우리 집안은 천주교를 믿으니 불가에 시주를 할 수 없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스님께 말씀을 전하려고 한발 내딛을 찰라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쌀을 가득 담은 조롱박을 주면서 스님께 갖다 드리라 하셨다. 결국 들통이 난 어머니는 할머니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우상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늘 가족을 위하여 묵주 신공을 드리셨던 할머니의 손에는 여전히 묵주가 쥐어져 있는데 이렇게 무너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많은 기억과 함께 한 할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우리 할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몸을 남겨둔 채 어디를 헤매고 계실까. 허공을 마구 움켜쥐고 물어보고 싶다.
식구들은 양로병원으로 모시자. 고 했고. 큰 딸인 어머니는 당신이 할머니를 끝까지 돌보겠다고 하셨다. 누구보다도 더 많이 같이 웃고, 더 많이 함께 눈물을 흘렸을 어머니는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당신의 엄마와 교감하며 고통을 견디려는 것이리라. 이 세상에서 서로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이 아닌가.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슬픔의 숙연함을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다한 사랑은 아름답지만 아프다.
방학 동안만이라도 할머니에게는 소꿉친구로, 어머니에게는 도우미가 되어드리라 다짐한다.
보슬비와 할머니 (손녀 지희선)
< 손녀 일기 - 5월 16일, 일요일, 보슬비>
오늘은 일요일. 할머니를 뵈러 집을 나섰다. 가로수는 봄빛 푸르른데 차창 너머 하늘은 잿빛이다. 빗님이라도 오시려나, 했더니 이윽고 차창이 젖어든다.
보슬비다. 가만가만 소리없이 내린다.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적시고, 서서히 온 몸을 적시는 보슬비. 도무지 서두름이 없다. 천천히, 서서히. 살금살금. 보슬비가 밤고양이 같다고 생각한 순간, 어쩌면 그리도 우리 할머니 병마와 닮았나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 치매. 사랑하는 이의 이름도, 아름다운 추억도 깡그리 지워버린다는 그 슬픈 병이 하필이면 할머니에게 올 줄이야! 실로 믿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묻고 또 묻고 하는 말에 엄마는 짜증이 났다고 한다. 깜빡 깜빡해도 나이 들어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는 사이, 가는 비에 옷 젖듯 할머니 병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아차, 하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치매 초기가 지난 상태였다. 절반의 기억과 절반의 기억 상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은 더욱 흐려질 것이라 한다.
이제는 집에서 계속 모셔야 하나, 치매 전문 양로병원으로 보내야 하나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머리론 양로병원이라 답하는데, 가슴으론 ‘집이지!’ 하고 답한다. 가족들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할머니......
나직이 홀로 불러보는 ‘할머니’ 소리에 절로 눈물이 난다.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우리 할머니. 엄마 아빠가 맞벌이 부부로 나설 때, 돌 볼 사람이 없어 할머니는 낯설고 물 선 이 땅으로 오셨다.
할머니 사랑은 ‘무조건’이었다. <미나리> 영화를 같이 본 엄마는 멀쩡한데, 난 할머니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 새, 집 가까이 들어섰다. 아직도 보슬비는 내리고 거리는 비에 젖어 번들거린다. 할머니가 드실 간식을 사러 마켓 앞에 잠시 차를 세웠다.
우산을 펴는 대신, 방수 후드 점프를 걸쳤다. 내가 하이스쿨 달리기 선수로 뛸 때 새벽이면 춥다고 할머니가 사 주신 바로 그 점프다. 나는 이십 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이 후드 점프를 버리지 못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 점프를 영원히 간직할 거다.
오늘 할머니를 만나면, 이 후드 점프를 기억하느냐고 물어 보아야겠다. 기억을 하고 계시면 오버 리액션으로 웃겨 드리고,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가 웰페어 돈 모아 사 주신 그때 이야기를 해 드려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집에 모시고 싶지만, 워킹맘이라 그럴 수 없어 슬프고 미안하다. 할머니를 위해 매일 밤 나는 기도를 올린다.
할머니! 부디부디 오래만 살아 주세요! 할머니! 사랑합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옆집 사람 박연실)
오늘도 뒷마당에 나가보니 담장 옆 나뭇가지에 대추가 한 봉지 달려 있다. 옆집 할머니가 달아 놓으신 거다. 어떤 때는 마당에 던져 놓기도 하고 어느 날은 가지에 얌전히 매달아 놓는다.
옆집에는 과일 나무가 많아서 계절 따라 넘어오는 것이 쏠쏠하다. 봄에는 비파를, 가을에는 대추를 넘긴다.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큰딸이 부지런하고 손끝이 야무져 텃밭에 푸성귀도 종류별로 키우고 있다. 그 덕분에 여름에는 상추와 깻잎도 마당에 던져져 있다.
처음에는 누가 던져 놓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가끔씩 마주치는 할머니에게 여쭈어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 없이 웃기만 하셨다. 서너 차례 받아먹기만 하다가 문 앞에서 마주친 큰딸에게 물어 보았다. 혹시 우리 집에 채소와 과일을 매달아 놓으셨냐고. 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할머니가 그러신 것 같다고 그냥 받아먹으라고 했다. 무슨 물건이든지 봉지에 넣어 숨긴다고. 할머니는 마당에서 딴 과일과 채소를 봉지에 넣어 우리 마당에 감추신 것이다.
요즘 들리는 말에 할머니가 치매 초기란다. 그래서 이제는 가끔씩 딸도 못 알아보고 오직 알아보는 얼굴은 아들뿐이라고 했다. 평소에 허튼소리 없고 옷매무새도 늘 깔끔해서 치매인지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작년 어느 날 할머니가 잠시 산책 나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혼자 어렵사리 집에 찾아 돌아올 수 있었지만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고 목소리는 떨렸다. 나도 가끔 백화점에 가면 길을 잃어버리고 물건도 잘 찾지 못한다고 위로를 해드렸다. 이제는 엉뚱한 일에 화를 내고, 집안 구석구석에 물건을 숨기고, 하찮은 일에 집착하고, 무엇이 없어졌다고 누가 가져갔는지 의심하고 식구들을 괴롭힌다고 한다. 그럴 때면 큰 딸은 심호흡 크게 하고 부모가 나를 어떻게 길렀는지 생각해 본다고 했다. 아이 기르듯이 어루고 달랜다고도 했다. 안쓰럽고 서글프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를 보살펴 주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다시 아이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할머니 치매가 더 깊어지더라도 아이 적의 좋았던 기억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치매 덕분인지, 치매 때문인지 우리 집 뒷마당에는 어느 날은 과일 봉지가, 어느 날은 채소 봉지가 열리는 나무가 있다.
오늘따라 날씨가 흐리다. 구름사이로 해가 들락날락 하는 모습이 꼭 요즈음 내 정신 같다. 내 나이 벌써 아흔 다섯이다. 옛날 같으면 하늘나라에 가서도 한참 터를 잡았을 나이인데 아직도 이 땅에 버티고 있다. 때로는 하나님 어서 날 데리고 가주세요. 기도하다가도 아니, 아니, 내 새끼들하고 손자 손녀 얼굴 보면서 여기에 더 살래요. 한다. 하늘나라로 가면 영원히 보고 싶어도 못 볼 텐데 하는 생각에 눈물도 난다. 그래도 빨리 떠나줘야 할 것 같다. 큰 딸이 너무 고생이다.
요새는 낯선 여자가 점심을 차려줄 때도 있다.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으면 그 여자는 엄마 딸이잖아 하며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내 어깨 위에 얼굴을 걸치고 훌쩍거리기도 한다. 내 딸은 삼단같은 머리에 볼이 통통한데 머리가 허옇고 비쩍 마른 여자가 언감생심 내 딸이라고 한다. 정신이 이상한 여자다.
지난주에 온 막내딸은 내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엄마는 언제나 장남, 장남, 하더니 큰오빠는 절대로 안 잊어먹더라.” 했다. 내 정신이 왔다갔다해도 큰 아들은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치매라고, 말만 들었는데 내게도 그것이 오는가 싶다. 기저귀를 채워주고 목욕을 시켜주던 내 품의 아가들이 이제는 나를 그렇게 해 준다. 옛날에 본 영화가 생각난다. 벤자민 버튼이라고 했던가? 주인공은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가 되어서 죽던데. 나는 아기로 태어나서 다시 아기가 되었다. 이리저리 살다보니 인생을 한 바퀴 휘익 돌아 제자리로 온 셈이다. 그런데 돌아온 아기는 방긋방긋 웃기는커녕 자식들 힘들까봐 눈물만 어린다. 치매가 오면 내 새끼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걱정이다. 내 마지막 소원은 자식들한테 폐 안 끼치고 자는 잠에 가는 거다.
오늘처럼 날씨가 흐린 날은 친정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나처럼 이렇게 외로웠을 건데 그때는 몰랐다. 나는 영원히 안 늙을 줄 알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더 잘해 드렸을 걸 후회도 된다. 내가 와작와작 김치를 씹으면 이빨 좋을 때 많이 먹으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내가 며느리한테 그렇게 말한다. 세월이 언제 이리 흘렀을꼬.
** 발표 PPT 첨부 파일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가족구성원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도 위미가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