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무지갯빛 희망 가져온 ‘백신’

이현숙 / 수필가
이현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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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21/02/04 미주판 17면 입력 2021/02/03 19:00

  밤새 비가 내렸다. 커피를 한 잔 진하게 내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게이트 앞에 던져진 겹겹이 싸인 신문 봉지를 집어 들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막 비가 그친 하늘에 무지개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가슴을 활짝 펴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찬 기운이 훅하고 들어온다.


무지개를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떠올려 봤다. 아일랜드에는 레프리컨이라는 요정이 무지개가 끝나는 지점에 황금이 담긴 항아리를 숨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이리스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무지개의 신이다. 성경 속에서도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 언약을 기억하라는 구절이 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무지개를 보며 소원을 빌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쌍무지개를 보며 남편과의 재혼을 결정했을 정도로 믿음을 갖는 편이다. 첫 결혼을 이어가지 못하고 혼자 살며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을 때다. 이혼한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만만치 않았다. 좌절하고 상처받아 지칠 때쯤 프러포즈를 받았다. 대답을 미루고 망설이는데 두 가족이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마침 겨울비가 내려 세상이 촉촉이 젖어 마음의 빗장이 느슨해졌다. 숙소 정원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그가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데 반대편 언덕 위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그것도 두 개가 나란히 피었다. 자연의 계시인가. 힘든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이제 밝은 날이 온다는 의미로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 순간 황홀하게 내 마음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래, 무지개는 약속이다. 그 분위기에 밀려 승낙했다.

오늘은 그날 이후로 내가 만난 무지개 중 제일 환하게 나를 감쌌다. 아마도 지난 주 내내 주위의 친지와 지인들이 코로나 백신 주사를 맞은 소식을 들어서였나 보다. 두세 시간 차 안에서 대기하다 맞았다는 분, 어제 맞고 왔는데 으슬으슬 춥고 마치 감기 걸린 것 같다는 분. 마치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상황을 알리는 밝아진 음성을 들으니 나도 저절로 들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상승세를 타는 감염자 숫자에 가슴을 졸였다. 주위 친지들이 코로나에 감염돼 집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에 함께 아파하기도 했다. 또 며칠 전까지 안부를 묻던 친구의 사망 소식으로 황당했는데 장의사의 일이 밀려 장례 일정이 빨라야 6주 뒤라니 더욱더 안타까워했다. 코로나 블루라는 표현처럼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다.

현재 나온 백신의 효율성과 안전성에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에 갇힌 듯 답답하고, 검은 구름 가득한 긴 장마에 창밖만 바라보는 것처럼 우울했는데 조금씩 그사이를 뚫고 빛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우선순위에 따라 맞다보면 여름 전까지 저위험군 사람들도 백신을 맞는 상황을 보게 될 것이라니 내 차례도 오겠지.

백신은 불안에서 곧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을 전한다. 비가 갠 후 나오는 무지개처럼. 그동안 집안에서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새로운 희망을 품자. 오늘 당장은 아니지만, 코로나의 공포에서 벗어날 날 길이 보이지 않는가. 무지개를 보며 인제 그만 코로나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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