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제사날>
오늘은 어머님 첫번째 제사날이다. 로스엔젤스의 오늘 날씨는 좀 흐리고 선선한 편이다.
지난해 아내의 생일날 어머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으니 아아 어찌 이날을 잊으랴. “메눌 아이야 나를 좀 기억해 다오” 하는 간절히 소원하는 어머니의 갸날픈 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삼본 양로원에서 기력이 다 떨어진 모습을 보고 한국을 떠난지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시고 말았다.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편안히 세상을 떠나셨으니 불행중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내과 함께 출근을 하면서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를 부르며
카풀 고속도로를 달린다. 보통때는 차가 막혀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학생들이 방학를 해서 그런지 오늘은 밀리지 안는다. 우리 두사람은 늘 카풀을 이용하니 얼마나 편한지 아내도 기분은 괜찮은것 같이 보였다.
아내는 이렿게 남편을 위해 운전도 해주고 카풀을 이용할수 있는 특권도 제공해주는 귀한 사람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이렇게 남편의 일을 도와주는 아내에게 감사할 뿐이다. 나의 늘 좋으나 나쁘나 변함없는 굳은 표정은 도대체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아내는 말한다. 속으로 좋아 하지만 표현이 부족한 탓이겠지.
아내가 집에만 있으면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 질것 같아 나는 아내와 함께 열심히 출근하기로 마음 먹고 달리는 것이다. 건강에도 도움이 될것 같아서다.
찬송가를 부르다가 “얼굴”이라는 가요가 튀어 나온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이노래가 좋아해 이따금 콧노래를 부르는데 아내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작년에 돌아 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어머니생각을 하며 흥얼거렸다.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신지가 오늘이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정말 세월은 잡을수 없고 막을수가 없다.
.혼자 운전을 할때 울적한 적은 있었는데 오늘은 아내가 옆에 있었는데도 옛날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뭉클해 진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친척 몇분들과 1주기 예배를 드리기로 아내와 약속한 날이다. 수십년간 어머니 생존시에는 아버지의 추모예배를 서울 동생네서 드려왔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 마저 돌아 가셨으니 내가 장남이니 이곳 미국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순리인것 같아 이곳에서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아내가 시집살이 할때 많은 시집 식구들을 건사하고 김장철만 되면 그 수많은 배추를 씻고 저리고 김치를 만들면서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어떤때는 야속한 마음도 들을 때도 있다고 한다. 이제 시어머니는 영영 돌아올수 없는 하늘 나라로 가신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고 하며 지내놓고 보니 덥지 않는 여름이 어데 있으며 고통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나의 인생을 일깨 주신분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감개무량할 다름이라고 아내는 털어놓는다. 공교롭게도 어머니 제사날이 아내의 생일과 겹첬으며 어머니 생일날도 겹첬다.
서울에서 여동생으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오늘이 엄마 기일이네요.
요즘은 이것 저것 바쁜일도 많다 보니 하루 당기고 조금 늦추고..
엄마가 바쁘셨 겠어요.
어제는 미국에서 추모 예배에 참석하시고 오늘은 서울에서
추모예배겸 생신예배에 참석하시고….
돌아 가신 첫생신은 고인이 좋아하신 음식을 차려 드리는 것이라 해서 사라다 만들어 먹었어요. 엄마가 그거 좋아 하셨거던요. 어떻게 돌아가신 날이 생신날이 될수 있는 것인지, 뭐 윤달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희안한 일이예요.
점점 더워지네요. 저는 내일 엄마 산소엘 다녀 오려구요. 지난번에 모두 산소에 다녀올때 못가서 마음에 걸려서요. 다녀와서 엄마 잘있나 보고 또 연락하께요.
건강 조심 하세요.
편지를 읽으며 그래 정말 희안하구나. 돌아가신 날이 본인 생일이고 또 아내의 생일날 돌아 가셨으니 잊지말고 열심히 추모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고 마음먹는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아이들은 모두 결혼해서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남은 여생도 어머니 추모 예배를 잘드리고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 하면서 살아 보련다. 서울 월곡동에서 생활 하던 모습을 다시한번 회상 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