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애니의 문패

이현숙 / 수필가
이현숙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19/06/19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9/06/18 18:35                                        
애니의 집 문패에는 '카사 데 애니'라고 쓰여 있다. 타일 위에 바다 빛깔로, 파도의 곡선을 타며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바다처럼 사람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포용하는 매력 때문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의 미소가 그립다. 올해로 83세인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긴 눈썹 안에서 바다를 품고 있다. 시누이 엘의 이웃이자 15년 지기 친구다. 멕시코의 산 펠리페에 있는 하시엔다 커뮤니티 하우스 단지는 주로 은퇴한 미국인과 캐나다인이 사는 곳이다. 80여 채의 주택이 모여 있다. 애니는 그들 중 하나이다. 작은 체구의 그녀는 20년 동안 이곳에 사는 터줏대감이다.

인사를 하러 갔더니 그녀의 집에 이웃이 모여 있다. 자치위원들이고 애니는 그들의 리더다. 한 달에 한 번씩 미팅하고 일정 금액의 돈을 모아 단지를 관리한다. 정화조를 설치하고, 도로를 고치며, 가로등의 전기요금도 정산한다.

그녀는 나이를 잊은 맹렬여성이다. 일주일 전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보험이 없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이웃, 세라의 일로 경찰서장을 찾아가 항의를 했단다. 멕시코에서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으면 일단 구속이란다. 이곳에 살지 않는 사람이라 법을 몰랐고, 피해자니 자동차 보험에 가입한다는 조건으로 벌금을 내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무조건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했단다. 그녀가 어떻게 했을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지난겨울 태풍으로 페티오의 페인트가 벗겨져 페인트를 칠하고 있어서 인지 그녀의 집은 어수선 했다. 서두르지 않고 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그녀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깨우친 경험으로 이제는 자격증 없는 핸디맨이다. 미국 샌타바버라에 콘도미니엄을 아들의 이름으로 바꿔 주고 유언장도 몇 년 전에 작성해 두었단다. 자식이 네 명이지만 각자의 가정을 꾸리며 살기에 걱정이 없으니 바다가 보이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별빛 흐드러진 이곳이 혼자만의 삶을 즐기기에 이곳이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그녀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내 모습은 어떨까. 매시간을 알뜰하고 소중히 챙길 수 있을까, 당당할 수 있을까, 여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담담할 수 있을까. 손에 쥐었던 것을 내려놓고 하루하루를 비우면서도 자신만의 시간으로 채워가는 그녀가 대단하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걱정은 이 별장 단지를 관리할 적임자를 찾는 일이다. 15년 노하우를 전달하려 해도 자원하는 사람이 없단다.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입주자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건강해야 해요." 내 말에 귀밑까지 활짝 퍼지는 그녀 특유의 미소가 아름답다. 바다를 담은 애니의 집 문패가 이곳에 오래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