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의 딸인 니콜이 묻힌 작은 공원묘지다. 아침이슬을 잔뜩 머금은 잔디가 그녀를 덮고 있다.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발이 무겁다. 저만치 찰리의 가족이 보였다. 그들과의 간격이 좁혀질수록 슬픔의 그림자가 더 짙어지는 듯하다.
니콜은 태어나면서부터 약해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학교보다는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증세가 심해져 우울증 약을 먹었다. 1년 전 그날, 딸의 방문을 연 바버라는 싸늘한 낯선 공기가 가득 찬 것을 느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저기 뒹구는 빈 약병들이 간밤에 일어난 일을 대신 말해 주었다.
부모가 죽으면 산소에,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하나님은 없는 게 낫다'라고 절규한 것도 스물여섯 살이 된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다. "내 수만 수억 기억의 가닥 중에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이 구절을 읽으며 자식을 앞세운 애통함이 느껴져 나도 한참 마음이 아렸었다. 자식의 얼굴빛이 달라져도 걱정이 되고, 병이 나면 대신 아파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필요하다면 몸 일부라도 내어 준들 무엇이 아까울까. 그런 자식이 먼저 떠났으니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것이다.
작년 이맘때, 니콜의 만 16살이 되는 스윗 식스틴 생일잔치를 준비 중이었단다. 소녀에서 숙녀가 된다는 의미로 마치 결혼식을 치르듯 하얀 드레스에 들러리를 세우고 잔치하는 것이 미국의 풍습이다. 바버라는 파티를 열어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려 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 알았다면 멕시칸식으로 낀세녜라(만 15세 생일잔치)를 해 줄 것을 후회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과 후회가 말끝에 꼬리를 단다.
찰리는 직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처리하지 못해 쫓겨날 뻔했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 누나를 잃은 열 살짜리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노력한다. TV를 보다가 니콜이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이 나와도, 음식을 먹을 때도 지나치는 또래 여자아이를 볼 때마다 담담하게 유지하려던 마음이 맥없이 무너져 버리지만.
태어나는 것이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누구의 자식으로, 누구의 친구로의 위치가 있기에, 생명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 나 하나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무슨 상관있냐는 변명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자신이 이겨내야 할 고통을 남겨진 이들에게 떠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콜! 참고 견디며 이겨내야 했어. 지금 가족의 헤어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의 수렁이 보이지 않니.
오죽했으면 자신의 삶을 끊을 생각을 했을까,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하려 애쓸수록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 안타깝다. 안에 담아두지 말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덜어내도 다시 채워지는 슬픔은, 잊으려 할수록 더 깊어지는 그리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남겨진 이들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