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숙
재미수필가
캐런의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 남편은 맥도날드의 기술자로, 50대의 백인 부부다.
그들에게는 9살인 이앤, 4살인 개빈, 3살인 칼슨, 이렇게 아들이 셋이다.
갑자기 왁자지껄 집안이 떠들썩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집안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가족은 색이 다르다.
펫과 캐런은 결혼 전에 아이를 낳지 말고 입양하자고 약속했다.
펫은 자신이 입양아로 행복하게 살았기에 돌봐준 양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생각이었고, 사회봉사센터에서 일하는 캐런도 입양아에 관심이 많았다.
결혼 후에 입양센터에 등록했다.
어느 날 텍사스의 입양센터에서 16살 미혼모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가서 만났다.
잘 키울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키고 출산 예정일을 기다리며 아이 맞을 준비를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집으로 데려와 아들 키우는 재미에 쏙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아이의 두 살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다.
소아과의사가 이건 저런 검사를 더 받으라고 하더니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주위에서는 평생의 짐으로 남겨질 아이를 왜 키우느냐, 왜 고생을 자처하느냐며 생모에게 보내라고 설득했다.
생모에게 보내지면 아이는 더 불행해질 것을 알기에 그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단다.
미국은 장애인의 천국이다.
사회보장국에서 치료비뿐 아니라 많은 재활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캐런은 직장을 그만두고 이앤에게 매달렸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아들을 위해 자동차 내부와 집안의 구조를 바꿨다.
세상에는 가족이 필요한 아이가 아직 많다는 이유로 흑인인 개빈과 중국인 칼슨을 입양했다.
한동안 어린 두 아이는 형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보고, 반응을 보기 위해 슬쩍 때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유치원에서 배운 춤과 노래도 보여 주며 기쁨조가 되어준다.
가끔 그 집에 가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이앤을 위한 병원용 침대와 산소통 이외에 의료 기구와 약품이 방안 가득하다.
거실에는 개빈과 칼슨의 장난감이 발에 걸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두 개구쟁이 때문에 소파에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 가운데서 캐런은 아이들 간식을 만들고, 시간 맞추어 이앤의 약을 챙긴다.
집으로 방문하는 간호사와 물리 치료사에게 이앤의 상태를 기록했다가 알려 주는 일도 벅찰 텐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원더우먼이다.
가끔 그녀는 주위 사람의 편견에 마음이 상한다.
왜 자기한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지, 좋은 일을 한다고 칭찬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가족은 사랑으로 묶여 사는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함께 사랑을 나누고, 정을 쌓으며, 의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가정이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또 아이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면 화가 난다는 그녀의 항변에 뜨끔했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지. 내 자식 키우며 마음 상하고 속 터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남의 핏줄을 왜 키우나. 입양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는 또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백인 부모에 백인 흑인 동양인 형제끼리 겪는 문화적인 차이와 바라보는 주위의 눈에 잘 적응하려는지. 이런저런 걱정이 꼬리를 물고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앤은 휠체어에 앉아 동생들이 맛나게 먹는 것을 바라봤다.
그 아이는 미소 천사다.
작년에 그가 폐렴에 걸려 아동 응급 병동에 있을 때 병문안을 하러 갔었다.
심한 기침에 평소보다 가래가 심하게 끓고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짓던 아이다.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며 턱받이로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줬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부르르 떨며 기쁨을 표현했다.
푸르고 맑은 그의 눈 안에 수많은 말이 담겨 있다.
수줍음이 많은 칼슨은 동양인이기에 마음이 먼저 간다.
다른 환경의 틈바구니에서 그 아이가 온전히 자리매김할지 걱정된다.
갈비와 잡채를 그의 접시에 올려줬다.
칼슨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든다.
수줍어하지 말고 당당해지렴. 개빈처럼 말썽을 부려도 씩씩하게 개구쟁이로 자라면 좋겠다.
세 아이가 도와주고 챙겨주는 온전한 가족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돌아가는 길도 복잡하다.
두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이앤의 휠체어를 밀어 차 안에 장착시키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차 안에는 백인 흑인 동양인. 피부색은 다르지만 진정한 가정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가족이 타고 있다.
사랑을 나누고, 정을 모으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칼슨이 나에게 천천히 말했다.
“숙! 내 이름은 Calson이 아니고 C.a.r.s.o.n이야.” 내가 무심결에 동양인이 헷갈리기 쉬운 L과 R을 바꾸어 잘못 불렀나 보다.
저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구나. 다행이다.
멀어지는 차를 보며 그들의 행복을 빈다.
색 다른 가족을 색다르게 보지 말아야겠다.
이현숙
재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