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쿠, 라세쿠 드디어는 헤이마
성민희
친구네 집에서 일어난 별난 사건을 소재로 글을 썼다. 미얀마에서 온 도우미 아가씨가 주인공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제시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도통 도우미란 느낌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세쿠란다. 맞다. 노세쿠. 진짜 이름을 넣으니 그런대로 글의 분위기가 살아나는데 저녁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도우미 이름이 왜 필요하냐고. 얼마 전에 꼬마들이 담벼락에 한 낙서를 노세쿠의 흑인 남자친구가 범인이라며 왁자지껄 했던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친구는 펄쩍 뛰었다. 사람들이 자기네 집이란 걸 금세 알게 된다며 당장 그 이름을 지워달란다.
할 수 없이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분위기상 미국 이름은 안 되겠고 노세쿠는 이제 못 쓰고. 노세쿠에서 글자 하나만 살짝 바꾼 라세쿠로 하면 어떨까? 그런데 라세쿠로 바꿔놓고 봐도 슬며시 걱정이 된다 수필은 이야기를 가설해 내는 소설과 달리 허구를 쓸 수가 없다. 엎치락뒤치락 한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나와 내 자아와, 내 자아와 타인의 자아와 소통하는 진지한 글이 아닌가. 체험의 정직한 서사(敍事)에 사실이 아닌 것을 끼워 넣었다가 그것이 밝혀지면 비록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사실일지라도 글 전체가 거짓이 된다. 어느 수필가의 글을 읽는 적이 있다. 그는 봄이 느껴지는 이름의 가을꽃을 봄에 피는 꽃으로 착각하고 봄 동산에 활짝 피웠다가 독자에게 된통 혼났다고 했다. 수필은 어떤 예를 갖고 오던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이어야 하고,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정보를 가져와야 한다며 그 수필가는 강력히 주장 했다.
목성균 수필가는 ‘나의 수필 쓰기’에서 약간의 거짓말은 미덕이라고 했다. 본인 작품 ‘세한도’에서 강 건너 사공집 앞에 실제로는 없었던 늙은 버드나무를 하나 세워 꿋꿋한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고세배 드리러 가는 행색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평생 등짐 한번 져보지 않은 아버지 등에 주루막을 지웠다. 그는 ‘보다 감동적인 문학적 조처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을 누가 나무랄 것인가?’ 라고 반문했다. 사실 그렇다. 객관적인 사건을 다루는 글에는 이름이나 장소, 주변의 무대 장치를 살짝 바꾸는 사소한 변칙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개성적이거나 고백적인 글, 즉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생활이나 체험을 되짚어서 재구성해낼 때는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때론 그것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문우 P선생은 친구와의 아픈 추억을 회상 하면서 오목교라는 전철역 이름을 썼다. 오목교를 들먹이며 친구 이야기를 쓰면 독자들이 금방 유명인사인 남편을 떠올릴 거라고 걱정을 하면서도 굳이 그 이름을 고수하고 싶어 했다. 오목교란 이름이 견우직녀가 애달프게 만나는 오작교를 연상시킨다며 슬픈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문우 H선생은 온 가족이 함께 다니는 교회 홈페이지에 술에 취한 아버지의 실수담을 소재로 쓴 수필을 올렸다가 혼이 났다고 했다. 본인은 유년기의 재미있는 추억이라며 글을 썼고, 교인들은 그 시대의 아버지 모습에 공감하고 손뼉을 쳤지만 언니와 오빠는 가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공개한 지각없는 동생이라며 질타를 했다.
나도 가끔 그런 일을 겪는다. 지역 신문에 남편과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칼럼을 게재한 날은 괜히 긴장된다. 퇴근하며 들어오는 남편의 표정 때문이다. 흉을 본 날은 회사 직원들한테 놀림감이 되었다며 퉁퉁 부었고 멋지게 묘사된 날은 싱글벙글 이다. 아들도 가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내 뒤에 서서 경고를 한다. 읽지도 못하는 한글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자기 이야기는 절대로 쓰지 말라며 목에 힘을 준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김광섭은 그의 저서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다른 문학보다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 것이 비록 객관적 사실을 취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딪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히 짜내는 심경적인 것이 아니요.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고 했다. 아무리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건 사이에서는 미묘한 감정의 그림자가 발생한다. 그 감정의 흐름을 성찰과 깊은 관조로 담금질한 후 진솔하게 토해내는 것이 수필이고, 그런 벌거벗은 고백의 수필이라야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에 감동한다. 그는 깊은 내면의 고독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적인 고통, 지독한 가난에 대해 조금도 감추거나 치레하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각 그대로, 떠오르는 생각 그대로 진실을 진심으로 썼다. 진실하고 애틋한 마음의 고백이야말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연민을 끌어올려주는 펌프이고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때로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망설인다. 이게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글인가? 창피한 글인가? 혹시 자랑으로 비춰지는 건 아닐까?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하면서 아직도 진정한 수필의 바다에 첨벙 뛰어들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서 촐랑거린다.
오늘은 노세쿠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가져와야 하는데 묘수가 없다. 나라 이름을 아예 바꿀까 하는 생각도 한다. 태국은 어떨까? 태국 식당에 가서 종업원 이름을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태국 사람이 남의 집 도우미로 일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 필리핀? 그것도 곤란하다. 필리핀 사람은 간호사나 의사가 많아 필리핀 도우미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다시 미얀마로 돌아가야겠다. 누가 읽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확한 미얀마 여자 이름을 찾아야 하는데. 아침나절 내내 인터넷을 뒤져도 대통령 이름 외에는 없다. 남의 대통령 이름을 도우미에 갖다 댈 수는 없다. 검색 창에 '미얀마 여자이름'이라고 입력했다. 그 나라의 여자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라는 말만 나올 뿐 그 흔한 이름을 정확히 말해주는 곳은 없다.
피곤하다.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다. 아래층에 내려와 커피를 끓인다. 달콤하고 고소한 고디바 커피향 속에서 갑자기 동남아 출장을 자주 다니는 아들이 떠오른다.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를 간다고 하던데 미얀마에도 가지 않을까? 얼른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들, 혹시 미얀마 여자애 이름 아는 게 있어?”
“왜? 어디에 쓰려고?”
“내가 현 아줌마네 이야기를 수필로 썼는데 그 집 도우미가 주인공이거든. 그런데 그 이름을 쓸 수가 없어.”
“미얀마 여자애 이름으로는 Sanda, Thanda, Thiri, Hayma가 많아.”
쌘다, 딴다, 티리, 헤이마? 아무래도 세 글자 이름의 느낌이 부드럽다. 헤이마가 좋을 것 같다.
“오, 헤이마가 좋네.”
이리하여 내 글에 등장하는 친구네 도우미 이름은 제시카로 시작하여 노세쿠, 라세쿠를 거쳐 드디어는 헤이마가 되었다. 커피를 꿀꺽꿀꺽 넘기며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보다 감동적인 문학적 조처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을 누가 나무랄 것인가?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카프카의 말 인용-
<수필미학 > 2018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