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채우는 항아리
채운다는 것은 비우기를 기다린다는 암시를 넌지시 비춘다. 항아리에 쌀을 담을 때마다 느끼는 기분이다. 빈 독에 쌀 포대를 거꾸로 쏟아부으면 뽀얀 안개를 일으키며, 알알이 튕기는 명쾌함이 있다. ‘짜르르’ 내려 쌓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부피만큼의 뿌듯함이 마음속에 차오른다.
부엌 한 쪽에 자리 잡은 항아리는 데리고 들어온 자식처럼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질그릇 특유의 투박한 표면에 난초가 어색하게 새겨져 있고, 연륜을 나타내듯 군데군데 실금이 흘러 지나갔다. 그 틈새를 때우려는 풀자국이 덧칠해져서 볼품없지만 부엌의 다른 현대적 용기들보다 더 애착이 간다. 어릴 적 어느 집이나 장독대가 있어서 자연스레 고향 집과 연상이 되는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식생활의 기본양념인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담은 크고 작은 독들이 일가를 이루며 당당히 주거환경의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 햇볕이 좋은 날, 장독 뚜껑을 열어 해바라기를 시키고, 수시로 닦아 반들반들 윤을 내시는 엄마의 모습을 자주 봤다. 집안에 흉사가 있으려면 멀쩡하던 장맛이 먼저 변한다는 미신 때문인지, 가족들의 먹거리에 대한 정성인지 우리네 엄마들은 장독대에 유난히 애착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미국에 와보니 시어머니 또한 뒤뜰에다 장독대를 만들어 놓으셨다. 크기와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번거롭게도 이민 짐에 묻어 들이셔서 고집스레 이국땅에 한국을 옮겨 놓은 것이다. 환경은 변했지만 혀끝에 길든 입맛은 그대로라 고추장, 된장을 담가 먹었다. 재료와 물맛이 다른 탓인지, 계절이 밋밋해서인지, 한국에서의 달짝지근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오지 않는다고 시어머님은 늘 속상해하셨다. 그러다 분가를 하면서 내 몫으로는 두 개가 남겨졌다. 무슨 용도로 쓸까 고민하다가 중간 독은 쌀 단지로, 작은 것은 소금단지로 결정했다.
그 중간 독에 쌀 한 포대를 부으면 3분의 2가 찬다. 꽉 채우는 것보다, 모자란 듯한 것이 왠지 여유가 있고, ‘더’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마음에 들었다.
아침마다 항아리에서 가족들이 먹을 양의 쌀을 꺼낼 때 기분이 참 좋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따뜻한 식사를 준비한다는 행복감 때문이리라. 배부른 포만감과 건강도 뒤따르며, 하루의 활력소를 넣어줄 발전소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쌀과 함께 담는 것이다. 하루 세끼 밥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 것이 삶의 목적도 아니지만 쌀독의 바닥이 보이는 속도가 빠를수록 즐겁고 흥분된다. 무언가 책임완수를 한 것 같은 충만함과 눈에 띄지 않는 변화가 집안에서 쑥쑥 돋아나는 든든한 기분이다.
작은 항아리에서 이런 소중한 매력이 느껴지는 것은, 그 어수룩한 모습 안에 잠재되어진 채워 넣을 수 있는 여유와, 퍼낼 수 있는 풍요로움을 닮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오늘도 독에 쌀을 부으며 행복도 함께 내 마음에 담는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고, 비지 않게 다시 채워 넣는 사랑으로 항상 준비된 항아리가 되고 싶다.
나 자신 또한 삶의 공허를 느끼지 않게 자신을 가꾸며 채워나가고 싶다. 내 안에 담긴 것이 있어야 퍼내고, 나눌 것이 있을 테니까. 올해는 가버리지만 내년으로 가득 채워져 연결되듯이 자연의 섭리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풀어준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가 기다리듯이 한 해를 보내는 문턱에서 다시 한번 그 뜻을 새긴다.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