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울려 온 전화
한 밤중의 전화벨 소리는 유난히 크고, 두려움의 무게로 떨려온다. 그 소리는 의식의 한 자락에 채 잠들지 못한 신경 줄을 건드려 두 번 넘게 울리지 못하고 받게 만든다. 그날도 잠을 청한 지 얼마 안 되어 비몽사몽을 헤매는데 자지러지게 울려대는 통에 깜짝 놀랐다.
눈꺼풀로 내려앉는 불안을 털어 버리려 한 차례 눈을 비비고 수화기를 드는 동안 가게에 알람이 울린 것인가, 연세 드신 어른들께 혹시라도, 하며 항상 마음 밑바닥에 깔린 덩어리들이 앞뒤를 다투며 떠오른다.
깊은숨을 몰아쉬며 수화기를 드니 생각지도 않았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내야, 흑흑… 언닌데 흐흑… 우리 가게 불났어. 흐흑….”
큰 울음 사이에 간간이 섞인 단어들을 내용도 파악하지 못한 채 급히 남편을 깨웠다.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걸치고 달려가는데 마음은 자동차보다 몇 발 앞서 날아갔다.
“별일 아닐 거야, 그렇지? 어느 한구석 조금 불에 그슬렸겠지!”
누구에게라기보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나쁜 생각을 몰아내려 애썼다. 미국에서 만난 사이지만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이고, 같은 업종을 운영하다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떻게 온 지 모르게 다다른 길, 맞은편에 새벽공기를 뒤흔드는 소방차 불빛의 어수선함에 온 신경세포들이 아우성을 쳤다. 차를 대강 세우고 뛰어내리니 매캐한 냄새가 코를 진동하고 소방대원들은 이미 임무를 마치고 호스를 걷어 들이고 있었다. 가게 문 앞에는 어린애 몸체만한 선풍기가 화기를 빼내기 위해 윙윙 돌아가고, 검은 물은 질척거리며 길가에 얼룩무늬를 만들었다.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설마 했던 것이 현실로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떻게 어떻게”를 연발하며 발자국을 떼어놓으니 구석구석 젖어 든 두려운 어둠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내려 앉히고, 숨쉬기조차 힘든 칼칼한 연기로 막막함을 들이마셔야 했다.
소방수들의 큰 장화에 이리저리 채며 뒹구는 캔, 뜨거운 불길에 뒤틀리고 오그라든 장난감들, 터지고 깨진 병들, 질벅이는 물속에 빠진 캔디들, 막 튀겨낸 팝콘처럼 열기에 속내를 보인 과자 봉투들, 그나마 성한 것들마저 까맣게 그슬리고 물세례를 받아 축 늘어져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 해도 진열대에 가지런히 앉아 필요한 손길을 기다리던 물건들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벽 속에 가려진 전기로 인해 이렇게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자잘한 물건 하나까지도 언니와 형부의 피와 땀으로 여물어진 결실들인데 무심히 짓밟고 다니는 소방수들의 발길에,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하며 웃는 그들에게, 조금 전까지 불길을 잡으려 땀 흘려 애쓴 노고에 감사는커녕 남의 불행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에 미움 섞인 짜증이 얼굴로 후끈 달아올랐다. 좀 살살 다루지. 금전으로 환산되기 이전에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데….
숨이 막히고 눈이 따가운데다 헝클어진 가게를 더 보기가 괴로워 주차장에 가보니 두 분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넋을 잃은 언니에게 달려가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내 울었다. 온 가게를 휩쓸었던 불길보다 더 뜨거운 슬픔이, 아픔이 가슴에서 전해져 왔다. 형부가 괜한 헛발질로 애꿎은 땅을 차고 있었다. 갑자기 밀려들어 온 불행을 거부하고픈 몸짓일 것이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는 재촉하는데 입안에서만 맴돌 뿐 위로의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 표현력의 미숙과 어휘력의 부족함에 스스로 화가 났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봐. 난 정말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내가 뭐 잘못했나 봐. 잘못 살아왔나 봐.”
언니가 던지는 넋두리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라, 그건 아니라며 강한 부정과 함께 꺼억꺼억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뜻하지 않은 불행 앞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기보다 자신의 살아온 길부터 뒤돌아보는 겸손함에 조금 전 소방대원들에게 괜한 불평 섞인 투정을 한 내가 부끄러웠다.
십 년 동안 쌓아왔던 공든 탑이 한순간 화마의 손길에 휩쓸려 잿빛 연기되어 날아가 버리는데 가만히 서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두 분의 애타는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천재지변이나 불의의 사고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벽녘에 울리는 전화벨처럼 불시에 찾아든다. 그리고는 평상시 삶의 리듬을 깨어버리고 크고 작은 상처를 준 후 미련 없이 떠나 버린다. 그 흔적인 상처의 치유는 피해자인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던 두 분이기에 이 아픔이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요히 흐르는 물에도 그 높낮이와 속도가 다르듯이, 끊임없는 시련을 겪으며 삶의 굴곡 속에 살게 되는 것이 인생의 과정이라 한다.
당장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와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게 하는 것이 삶의 숙제이기도 하리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어 배가 된 기쁨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더 있어 보았자 소용없으니 그만 돌아가자며 언니의 등을 다독이는 형부의 차분한 모습에서 그 삶의 깊이를 깨달았고, 안으로 삭이는 자제력에 듬직함을 느꼈다. 참담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리다 다시한번 언니를 보듬어 안았다. 온몸에서 풍기는 화마의 냄새가 슬픔을 대변하듯 코를 자극했다.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