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악마의 손길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 서너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검은색이 풍기는 중압감에 섬뜩한 느낌이 들어 잠시 머뭇거리는데 그들 중에 단골손님인 죠지가 함께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예사롭지 않은 표정이라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물으니 빅터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빅터빅터가 누구더라?’


머릿속을 더듬으니 한 얼굴이 그려졌다. 나이는 22살로 죠지의 친구인데 우리 가게에 같이 오곤 했었다영화배우 같은 헌칠한 외모에다 단단한 체격의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성격도 활발해서 금방 친해졌는데 어느 순간 그의 모습이 눈에 띄게 변해갔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체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최근에는 휑하니 서늘한 얼굴에 퉁퉁 부은 팔과 다리 군데군데 담뱃불로 지진 듯한 흉터가 보였다마약을 복용해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이라고 죠지가 귀띔을 해 주었다.


그를 볼 때면 은근히 설레곤 했는데 이제는 돈을 내밀면 나쁜 것들이 옮겨올 것 같은 불결한 느낌이 들어 께름칙했었는데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한 인간이 무참히 무너져 가는 모습을 방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서툰 영어지만 진심으로 그의 건강에 대해 한마디쯤 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도대체 마약이 무엇이기에어떤 마력이 있기에 한 번 손아귀에 들어온 사람은 놓지 않고 그 인생을 망치는 것일까.


보통 처음에는 친구들의 권유로호기심에주위의 압력이나 또는 부모를 통해 마약을 접하게 된단다차츰 죄의식은 무감각해지고, 마약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갱단에 가입하는 것이 다음 단계라 한다약 살 돈이 필요하게 되니 다른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쉬운 돈벌이기에 그 스스로가 마약밀매 장수가 되기 다반사다.


약도 처음에는 대마초인 마리화나로 시작해 강도나 양이 증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도가 깊어지면 환각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타인의 생명줄까지 좌지우지하거나, 자살을 하는 불상사를 초래하기도 한다. 결국 빅터도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자살 아닌 자살을 한 셈이다. 히스패닉이 주로 모여 사는 동네에서 일을 하는데 하루에도 몇 명씩 마약 중독자와 밀매자를 접하게 된다아까운 인생을 탕진하는 그들이 답답하고, 그들의 가족들이 겪을 고통이 안쓰럽다.


요즘은 인종과 연령을 뛰어 넘어 악의 세력이 확장되어지기에 더욱 불안하다한인커뮤니티도 더 이상 예외 지역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잘 나가던 젊은 변호사가 마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차례 은행 강도를 하다 체포되었다대량의 밀수와 그 연락책의 핵심부에 한인이 있었기에 교포사회를 놀랬켰다.   청소년 간에는 마약 값 때문에 납치를 하거나 폭력이 오고가기도 하고,   심지어 도둑을 위장해 자신들의 집을 돌아가며 털기도 한단다.


충동적인 청소년층을 확보하기에 가격이 싸지고 사용방법이 간단해졌다고 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점에다 중독성이 강해 한번 탐닉하기 시작한 마약의 굴레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질질 끌려 다니게 만든다. 다섯 명에 한 명이 대마초를 피워 본 경험이 있다니 결코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일 관계로 만난 분의 가정이 마약 중독으로 고통을 겪은 모습을 보았기에 그 심각성이 더 피부로 느껴졌다.   외형적으로는 어느 한군데 나무랄 곳 없는 화목한 가정으로 비추어졌었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금지옥엽 외동딸을 키우며,   부부간의 애정 또한 다정다감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등바등 사는 우리와 비교되며 은근히 부러워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분의 눈물을 보게 되었다.   자식을 키우는 같은 부모의 입장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 주었다.


어느 날 철썩같이 믿었던 딸에게서 마약에 중독된 증세를 느끼게 되었단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면 하는 착각에 하루하루 시간을 끄는 동안 딸은 점점 나빠졌다.   남보기 부끄럽고 흉잡힐까봐 쉬쉬하며, 이리저리 숨기고 감추었단다.   마약 중독 자체가 음성적이라 심각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노출이 되지 않아 조기 발견과 치료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다 말겠지. 근본이 착한 아이니까. 친구 탓일 거야.’


부부간에도 한 동안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하며 그로 인해 상처 위에 더 날카로운 생채기가 나 몇 배의 고통이 보태어졌다.   어르기도 하고 달래도 보고 위협도 사정도 해보았지만 이미 딸은 부모가 조절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결국 마약 전문 치료 기관을 수소문해 치료를 받았고,   차츰 증세가 호전되어 이젠 마약 방지 프로그램에 다니며 가족 관계도 많이 회복되고,   서로 아픈 부분을 다독이고 끌어안게 되었단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돼 듣는 나도 마음이 덜 아팠다.   어설픈 내 위로를 받아 줄 정도로 그분의 마음도 많이 편안해진 상태였다.   지옥의 문안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고 그 시간들을 표현했다.


이민 온 후로 생활의 기반을 다지려 밤낮을 잊은 채 일에 매달리느라 딸에게 소홀했던 것이 후회된단다.   이중 문화권에서 딸이 겪었을 혼돈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외로움이 그녀를 마약의 손길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았으리라고 그분들은 추측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녀들이 마약 남용의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부모가 마약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자녀가 마약을 복용한 흔적이 엿보이면 전문가와 상담하고 예방하는 노력 또한 요구된단다.   끊임없는 관찰과 이해,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마약에 대해 무지해서 그 또한 아는 바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춘기의 아들을 키우는 부모로서의 임무이고 책임이다.


빅터의 죽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죠지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성인들의 그림이 붙은 큰 초를 몇 개 봉투에 담아 주었다.   빅터의 명복을 빌고,   백색가루의 유혹에 넘어가 인생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웃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