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간



편찮으신 엄마를 보면서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라는 성 파울로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는 표현이 우리의 생에 어울리는 것 같다. 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할 때 각자에게 일정한 시간을 주고 우리는 어디가 끝인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것이 아닌지.


  한동안 이런 우스갯소리가 유행이었다. 20대에는 20마일로, 40대에는 40마일로, 80대에는 80마일로 세월은 달린다고. 나도 어릴 적에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며 시간의 느림을 재촉했는데 이제는 아니 벌써라며 시간의 빠름에 허무해 한다.

지난주가 엄마의 80세 생신이었다. 잔치하겠다며 서울로 나오시라는 가족들의 연락에 엄마는 건강에 자신이 없고, 일가친척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거절을 하셨다. 그 대신 이곳에서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엄마, 언니, 나 그리고 친한 언니. 4명이 23일의 일정으로 자이언트와 브라이스 캐년을 다녀오기로 했다. 오랜만에 같이 하는 여행이라 수학여행을 떠나는 여학생들처럼 들떠 있었다. 첫날 호텔 방에서 잠깐의 밤 외출과 다음 날 입을 옷을 고르느라 준비해 간 옷을 모두 꺼내 입으며 패션쇼를 했고,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새벽이 온 줄도 몰랐다. 다음날 중간중간 경치 좋은 곳에 내려서 엄마를 중심으로 헤쳐 모여 하며 사진을 찍었고, 몇 백 년 동안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웅장한 대자연의 모습에 감탄했다. 또한, 몇 년 후에는 풍화작용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설명에 길어야 백 년을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그에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임을 느꼈다


이틀 밤을 라스베가스에 머물며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고, 제일 길게 또 원 없이게임을 했다. 1센트짜리 기계 앞에서 넷이 나란히 앉아 누군가가 이길 때는 환호성을, 잃을 때는 안타까움을 서로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같은 버스를 탔던 여행자들이 우리를 부러워했고, 엄마는 다음에 또 이런 시간을 갖자며 좋아하셨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병이 나셨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질 않고 어지러워서 움직이실 수가 없단다. 병원에 모시고 가려고 집에 갔더니 침대 모퉁이에 웅크리고 누워 계셨다. 잠옷 사이로 비친 앙상한 어깨와 뼈만 남은 다리를 보니 왠지 화가 치밀었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오는데 눈물이 핑 돌고 그것을 억누르느라 얼굴의 근육들이 욱신거렸다.


엄마, 그러게 뭐 좀 드시고 그래야지, 빈속에 독한 약만 자꾸 드시니까 그렇지요.”라며 마음과는 달리 짜증을 부렸다. 우리 칠 남매가 아플 때 밤낮 안 가리고 뛰어 다니셨는데 밤새 혼자 앓으며 흘린 땀 자국이 베갯잇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옷을 갈아입으며 힘에 겨우신지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시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행 도중 예전의 엄마와 다른 행동을 언뜻언뜻하셔서 언니와 여러 번 당황했다. ‘우리 엄마 맞아?’ 하는 의미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지신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한의원에서 약을 지으면서 괜히 여행을 모시고 갔었다고 후회를 하는 언니를 달래다 문득 여행 마지막 날에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여기 살고 있다는데보고 갔으면.’ 하셨다. 내 생각이지만 엄마는 이번이 엄마의 삶에서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하시고 라스베가스에서 머문다는 일정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선뜻 여행을 승낙하셨는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사람이 그곳에 산다는데, 생전에 한번 우연히라도 봤으면 하는 엄마의 아픈 생인 손가락’.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유독 약골이라 엄마의 손길을 많이 받았었다. 나 자신도 여행을 떠나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마음을 접지 않았던가. 마음의 병, 그리움의 병일지도 모르는데마음속에 큰 응어리를 안고 계신 우리엄마. 그것이 엄마의 시간을 더 잡아당기지 않기를 바라며 그냥 여독으로 인한 몸살일 거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점점 줄어드는 엄마의 시간’. 죽음이란 생명을 창조한 거장이 같은 손으로 만든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자연스레 주어지는 늙음에 저항할 수도, 소용도 없지만, 엄마의 쇠약해지신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속상하다. 남겨진 시간 동안 편안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셨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


엄마, 힘내세요. 그리고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지금까지도 그러셨듯이 자식들의 의지가 되어주세요.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엄마, 아셨죠?’

엄마의 남겨진 시간까지도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보채는 내 모습이 너무 이기적이다.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