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낡은 점퍼
벌써 몇 년째인가. 어머니가 아버지의 빛바랜 점퍼를 또 꺼내 입으셨다. 어머니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하고 낡은 그것은 해마다 주인을 기다리지만 올해도 주인 대신 어머니 몸에 걸렸다. 아버지의 사진이 경대 위에서 TV 앞으로 식탁으로 옮겨 다니는 12월이 다시 왔나보다. 해가 몇 번 바뀌면 마음에 굳은살이 앉을 법도 하건만 십여 년을 흘려보내도 이맘때만 되면 어머니의 상처는 벌겋게 다시 일어난다. 단 한 달만 일주일만 아니 하루만이라도 아프다가 가실 것이지. 어이 이리 무심한 사람인가. 어찌 이리도 냉정한 사람인가. 어머니의 원망 소리에 우리들의 겨울은 그 날 이후로 더욱 추워졌다.
추수 감사절을 막 보내고 거리의 가게들이 하나 둘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하던 겨울의 초입. 그 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회색 하늘을 뒷마당 담벼락까지 끌고 내려왔다. 담쟁이덩굴도 빗물에 흠뻑 젖은 채 느닷없이 찾아온 찬바람을 힘겨워했다. 아들의 바이올린 레슨을 다녀오는 길에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매일 동생네 아이들을 픽업하시던 아버지가 오늘은 학교에 나타나지도 않고 전화기도 꺼져 있단다. 텅 빈 운동장에서 몇 시간 째 비를 맞으며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걱정보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가슴을 조여 왔다. 어머니는 파마를 하러 가신다더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텅 빈 아버지의 방 책상 위에는 약병과 메모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전화번호부에서 아버지 필체의 번호를 찾아 무조건 돌렸다. 자주 가시던 기원 주인은 물론 친구 분들 조차도 한결같이 오늘은 뵙지 못했다고 했다. 허둥대는 나를 무심히 바라보던 아들이 한마디 했다. 엄마가 자꾸 전화를 쓰면 계속 통화중이라 오히려 연락을 못 받으니 차분히 누군가에게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자고. 마음 같아서는 어디든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은데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사우나 욕탕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가셨단다. 여자는 ‘종일 전화를 해도 아무도 안 받더니 이제야 연락이 되었다’며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던진다. 병원을 찾아 동생과 함께 달렸다. 오전에 일어난 일이라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온갖 불길한 예감이 다 든다. 빨간 신호등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스팔트 위에서 번들거리는 빗물이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내 눈을 마구 찔러댔다. 의식 불명이라도 좋고 반신불수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계셔 달라고 엉엉 소리 내어 기도했다. 동생이 옆에 앉아 전화로 이리저리 담당자를 찾았다. 한참 만에 연결된 간호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운전 중이냐고 물었다. 운전하는 사람 따로 있으니 안심하고 상태를 말해 달라는 동생의 애원에 머뭇거리던 목소리가 잦아들며 '아임 쏘리' 했다. 설마 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아버지를 부르며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간호사가 데리고 들어간 방에서 아버지를 뵈었다. 아, 아버지... 아버지는 암만 불러도 오실 수 없는 강을 건너가신 지 이미 오래였다. 드라마에서만 봐 오던 죽음과의 만남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만나본 만남이었다. 아니 이별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 곱게 파마를 한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된장국을 끓이고 계셨다. 아버지의 죽음을 전화로 전해들은 어머니는 내가 집 앞에 차를 들이댈 때까지도 무슨 말인지 말귀를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무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앞으로 휘어진 어깨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엉금엉금 차에 기어오르면서 '참말이가?' 만 연발하셨다.
다음 날. 사우나 앞에 세워둔 아버지의 차를 찾아왔다. 동생네 갖다 주라며 어머니가 트렁크에 실어 놓은 김치병과 반찬들이 그대로 있었다. 운전석 등받이에 걸려있던 회색 점퍼를 집어 드신 어머니가 그 때에야 주저앉았다. 너그 아버지 어데 가셨노? 왜 잘 있거라 한마디도 안 해주고 갔노. 혼자서 우찌 가셨을꼬. 외로워서 우찌 가셨을꼬. 너그 아버지 불쌍해서 우짜노.
그 때 아버지 연세가 일흔 아홉 살이었다. 살아계셨으면 올해로 아흔 살이다. 지금까지 살아계시라고 욕심을 부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 년 더 살면서 병치레를 조금이라도 하다가 떠났으면 어머니의 아쉬움이 저렇게 크지는 않으실 터인데 싶다. 간혹 남편이 노환으로 누웠다는 주위 사람의 말을 들으면 어머니는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하신다. 죽이라도 끓여 마지막 사랑을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자식까지 낳으며 한세상 함께 한 인연에게 안녕 인사는 하고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며 병수발에 지친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신다.
캘리포니아의 우기가 올해에는 일찍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아버지가 심어 놓으신 감나무의 감이 젖어 있다. 영문도 모른 채 겨울이 다 지나도록 허공에 매달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그 해의 가여운 감을 다시 보는 듯하다. 해마다 가을이면 시름시름 기운 잃은 낙엽들 사이에 발갛게 매달리는 감처럼 아버지의 낡은 점퍼는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몸에 걸렸다. 해마다 낡아가는 열매, 해마다 작아지는 나무를 만나는 우리의 겨울은 올해도 몹시 추울 것만 같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중앙일보 문예마당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