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칸 너머의 세상
굵은 남자 목소리다. 보톡스를 얼마 만에 맞느냐는 질문에 3개월 마다라며 짧게 대답한다. 몽롱하던 눈꺼풀이 번쩍 떠졌다. 남자가 보톡스를? 커턴 너머의 대화가 나의 나른함을 흔들어 깨운다. 남자가 계속 말한다. 어째 이쪽과 저쪽, 장단지를 거쳐 발바닥까지 침을 놓아 주세요. 마치 준비해 온 처방전을 읽는 듯한 말투에도 네, 네로 인내하는 의사 선생님. 어느 새 옆 칸으로 옮겼나 보다. 이번에는 할머니다. 병 든 할아버지 수발에 손가락마디까지 아프다며 노부부의 끈끈한 정을 풀어낸다. 커턴으로 둘러쳐진 작은 공간에서 등과 어깨에 침을 꽂은 채, 오늘도 양쪽 귀를 세우고 낯선 사람들의 세상을 엿듣는다.
그 날은 기차로 출퇴근을 하는 남편을 위해 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주거니 받거니 수다를 떤 게 사단이었을까. 차가운 날씨가 우리의 입김을 허연 성에로 잡아끌어 앞 유리창에 가득 앉혔다. 마주하고 쏟아지는 햇살이 차창의 성에를 통과하며 운무처럼 퍼져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앞이 잘 안 보여” 당황스런 마음에 속력을 줄이며 길 옆으로 잠시 차를 세우려는데 쿵 하며 뭔가를 받아버렸다. 기어는 드라이브에 놓여 있는데도 차는 맥을 놓은 채 기름을 줄줄 흘린다. 매캐한 냄새가 차 안에 가득 찼다. 핸들 위에 널브러진 에어백 너머로 하늘로 치솟은 범퍼에서 허연 연기가 펑펑 나오는 게 보였다. 어깨가 찢어질 듯 아파 덜컥 겁이 났다. 다리를 살그머니 뻗어보니 약간의 통증만 있을 뿐 멀쩡하다. 찌그러진 문을 겨우 밀고 밖으로 나오는데 헬로우 헬로우 부르는 소리. 누가 다쳤나요? 구급차가 필요합니까? 어느 새 차와 911 이 자동으로 연결되었다.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신음하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행이다. 멀쩡하다. 경찰이 곧 도착할 겁니다. 몇 명이나 다쳤나요? 차에서 계속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그 와중에도 손을 내젓는다. 응급실로 실려 가면 종일 시달릴텐데. 오전에 중요한 미팅이 있단다. 아무도 안 다쳤어요. 고함을 질렀다. 어디서 달려왔는지 앵앵거리며 소방차가 오고 경찰차도 두 대나 왔다. 앞이 안 보였다고, 햇빛 때문이었노라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찰이 픽 웃었다. 너가 까뮈의 ‘이방인’ 주인공이냐 묻는다. 햇살에 눈이 부셔 우발적 살인을 저질렀다는 ‘뫼르소’? 나도 같이 웃었다. 사고의 주범도 찾아냈다. 온 몸에 회사 상표를 문신처럼 새긴 커다란 밴이, 하반신이 구겨져 반 토막이 된 내 차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조그만 차가 겁도 없이 점잖게 계시는 탱크를 들이 받고는, 오히려 저가 놀라 뒤로 튕겨 나앉은 형국이었다. 경찰은 위로는커녕 만신창이가 된 내게 티켓을 한 장 던져주고는 가 버렸다. 죄목은 위험한 운전이었다.
벌써 이주일 째. 오늘도 온 몸에 침을 꽂은 채 누런 커턴 칸막이 안에 누워있다. 내 몸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어느 날 툭 밀치고 들어와 주인 노릇하고 있는 무례한 녀석. 제멋대로 휘젓는 그 난동에 내 삶은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끌려 다닌다. 시간도 인간관계도 돈도 모두 힘을 잃고 그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읽은 박완서씨의 ‘외출을 할 때는 먼저 몸과 상의를 해야 한다’던 구절이 생각난다.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내 육신을 맘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고 살았다.
보톡스 남자가 나갔나 보다. 이제는 어깨가 아파 한 잠도 못 잤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 칸 너머의 세상에서 제각각 다른 자기 몫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야 시간만 지나면 나을 거지만, 정말 힘든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육신의 고통과 그로 인한 정신적 고뇌를 함께 감당해야하는 가여운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해진다. 황량한 들판에 혼자 서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을 그들. 진심을 다해 따뜻이 안아주고 싶다.
이제 일어나세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낭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