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애니팡


 꿈속에서 펑 하고 애니팡이 터졌습니다. 짝을 맞췄는데 뭘 맞췄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냥 뭔가 터지는 소리에 잠이 깼답니다. 창밖은 아직도 어둠이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소나무 가지에 고즈넉이 걸려있습니다. 핸드폰 안에서 짝을 지은 동물들이 손을 잡고 달아나며 내 잠도 함께 끌고 가 버렸습니다. 어젯밤 늦게 딩동동 카톡 소리에 빨간 하트 하나가 실려 왔습니다. 그 유혹을 못 이겨 베개를 등에 지고 앉아 몇 번 짝을 맞춰주었더니 내가 잠을 자는 사이에도 토끼는 토끼끼리 돼지는 돼지끼리 무척 나대었나보네요. 꿈속에서까지 게임을 했나하는 생각에 픽 민망한 웃음이 납니다.  

 어느 날 여기저기에서 카톡이 분주하게 고양이, 쥐, 토끼, 돼지, 원숭이, 개를 실어다가 내 핸드폰 화면에 부려놓았답니다. 한국의 친구한테서도 날아오고 뉴욕의 아들한테서도 날아왔지요. 같은 동물 세 마리로 짝을 맞춰주니 파도처럼 물보라를 남기며 터져버리네요. 배경 음악도 손가락을 좀 더 빨리 놀리라고 흥을 돋웁니다.
고양이는 고양이끼리 돼지는 돼지끼리 모이기만 하면 잭팟처럼 펑 터지니 짝을 짓는다는 건 곧 어떤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는가 싶습니다. 사람도 혼자 있는 것 보다 짝을 지으면 훨씬 대담해지지 않는가요. 데모라는 것도 그렇고 파업이라는 것도 그렇지요. 정치가들도, 깡패들도 무리가 지어지면 무서울 게 없더라고요.
 분노의 감정도 그렇지요. 한두 번은 잠잠히 참다가 어느 날 터져버립니다. 겨우 그것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상대방은 당황하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는 전부터 고여 있던 것이 그 순간 짝을 만난 것이지요. 언젠가와 똑 같은 온도와 습도의 환경이 주어지면 숨어있던 트라우마가 짝을 만나 감당 못할 정도로 태도가 변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 옆에다 다른 고양이를 한 마리 끌어 놓다보니 곁에 있는 원숭이가 자리바꿈한 덕분에 저절로 짝이 지어지네요. 이런 경우는 두 짝이 한꺼번에 터지느라 폭탄처럼 우렁찹니다. 순간적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 놓고는 주워 담을 수 없어 사과도 하고 후회도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인가 봅니다.

  감정이란 게 맹물처럼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가끔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상대방을 할퀴고 싶은 마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돼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지는 환경을 묵묵히 집어먹는 우직함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곁눈질하는 쥐의 음험함을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원숭이처럼 어줍잖은 흉내를 내는 위선도 만나고 손해를 보더라도 개처럼 의리를 지키고 싶은 어리석음도 만나지요. 토끼처럼 산뜻하게 뛰고 싶을 때도 있답니다.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마음속에 자리 잡는 감정의 모양이 수시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고양이 세 마리가 짝을 지어 누군가를 할퀴어 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싫습니다. 개 세 마리가 짝이 되어 주인을 위해 싸우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감동스럽고요. 부대끼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 삶에서 이왕 부대낄 바에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미움이나 질투 같은 황폐한 감정들은 제때제때 털어내고 소화시켜 짝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사랑과 나눔 같은 생명의 감정들은 짝을 많이 만나도록 격려해주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이 내 핸드폰을 휙 뺏더니 게임을 신나게 합니다. 얼마나 빠른지 손가락 끝이 안 보일 지경입니다. 짝을 만난 동물들이 쉴 새 없이 터지는 모습은 마치 분수가 치솟는 것 같기도 하고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겨우 내가 올려놓았던 4만8천이라는  점수가 무려 17만까지 올라갔습니다. 역시 디지털 세대입니다.

 

   나는 아날로그 세대임을 인정합니다. 게임으로는 도무지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지요. 핸드폰을 붙들고 동물의 짝을 맞추고 있을 주제가 아니네요. 좋은 책을 많이 읽어 우아한 어휘의 어장을 만드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머릿속의 애니팡이 서로 어울리는 글의 짝을 찾아 황홀한 문장을 마구 터뜨려 주면 좋겠습니다. 분수처럼 불꽃처럼 펑펑 말입니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미주문학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