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안을 간지럽히며 사랑이 밀려온다. 가는 줄을 타고 술술 넘어온 밀어가 귓속에서 맴돌다가 머리를 울리고 가슴까지 전달됐다. 상처 위에 소독약을 바르면 치료가 되느라 아려오듯이 가슴속의 생채기가 저렸다.

 

<힘겨워 지칠 때 날 항상 일으켜 주던 고마웠던 사랑 외면했어도 이젠 알 것 같아요. 사랑의 의미를날 위해 흘리신 눈물 이젠 내가 닦아 드릴 거예요. 내가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해 주던 그 사랑 내겐 힘이었어요.>

 

가사의 내용이 상황을 표현한 듯해, 그 안에 실린 의미가 차곡차곡 흘러내리며 울적한 감정의 실금을 덮어주었다.

 

새벽부터 내리던 이슬비가 달리는 차의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왈츠를 추듯 경쾌히 날리는 빗방울과 달리 차 안에는 멋쩍은 침묵이 흘렀다. 남편과 큰아들 그리고 나, 먼지까지 분위기에 눌려 내려앉았고, 차창의 물기를 닦느라 바쁜 반원형의 와이퍼를 좇는 6개의 눈동자 구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 풍경은 아침나절 차 안의 그림이었다.

애태우던 일을 해결하고도 무언가 찜찜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길. 뒷좌석에서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던 아들이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며 이어폰을 넘겨주기까지 어색한 분위기는 계속 연결되었다.

“Mom I Love You로 끝을 맺는 호소력 깊은 가수의 음색에 아들의 음성이 겹쳐지며,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눈물을 슬쩍 훔치며 이어폰을 건네니,

다른 거 하나 더 있어요. 들어봐, 엄마.”

자신의 왼쪽 귀에 이어폰을, 다른 쪽 것은 내게 다시 내밀었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랩이 아닌, 분위기 있는 곡이라 듣기가 편했다. 흘러내리는 빗방울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 늘 함께 있어 소중한 걸 몰랐던 거죠.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준 소중한 사람들. 가끔씩 내가 지쳐 혼자라고 느낄 때 언제나 내게 힘이 되어준 사람들을 잊고 살았죠. (중략)다 함께 손을 잡아요. 그리고 하늘을 봐요. 우리가 함께 만든 세상을 하늘에 그려봐요. 눈이 부시죠. 너무나 아름답죠. 마주 잡은 두 손으로 우리 함께 만들어가요.>

 

조금 전과는 달리 경쾌하고 빠른 곡이었다. 언젠가 그가 좋아하는 H.O.T. 펜클럽 창단식이 파사데나에서 있었는데, 같이 가서 손뼉 치며 부르던 노래였다. (Hope). 그때의 흥겹던 시간이 떠오르고, 되새겨본 가사로 마음의 귀가 열리면서 저며 오는 가슴 언저리를 다독여 주었다.

어젯밤 아들에게 품었던 섭섭한 감정도 함께 사그러졌다. 다음날이면 법정에 서야 할 아이가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음악을 듣기에 그의 뒤통수에 대고,

철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고 태평일꼬네 일이지 내 일인가.’

야속하게 느껴졌었는데 인제 보니 이런 꿍꿍이속이 있었나보다. 자신의 마음을 엄마에게 대신 전해 줄 적절한 노래를 고르느라 애썼을 그의 노력이 느껴졌다. 내성적인 성격에 어울리는 아주 그럴듯한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평소에 사춘기의 아들과 대화 채널이 필요함을 느꼈기에 나 또한 음악을 매개체로 아들에게 접근했었다.

올해로 15세인 아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2세이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부모라 어릴 적부터 어른들께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라는 규칙을 정해 주었기에 아이는 한국말을 잘했다.

특히 음악을 좋아해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자기 세대의 노래는 전주만 들어도 척척 맞춘다. 가수 이야기 등 연예가 소식을 서로 나누다 보면 그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고,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곤 했다. 가끔 노래를 들려주며 가수와 곡명에 대한 퀴즈를 내기에 거기에 장단을 맞추다 보니 나도 웬만한 노래는 알게 되었다.

그래! 네 마음을 나도 알고 있어. 고맙다. 우리 이제 다 잊고 밝게 살자. 희망을 품고 말이야. 서로 사랑하며.’

아들에게 보내는 화답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눈물과 함께 목 안으로 삼켰다. 그동안 서로 간에 말 못 하고 가슴앓이했던 사건이 해결됨과 동시에 마음의 앙금까지 스스로 녹아 버렸다. 아침나절만 해도 야속했던 겨울비는 어느새 차 안의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보슬보슬 단비로 내리고 있었다.

 

1999118일은 우리 가정을 뒤흔든 사건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 날은 월요일로 일주일의 시작이라 밀린 일 처리에 바쁜 오전을 보냈다. 그런데 전화벨이 울리며

여기 학교인데요.”

학교라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시간에 학교에서 오는 전화란 등교한 아이가 아프다거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불길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임을 확인한 학교 측에서는,

당신 아들이 담배와 라이터를 소지하고 있다가 학교 경찰에게 적발이 되었습니다. 하루 정학을 주었기에 이 시간 이후 학교에 머무를 수가 없으니 데려 가십시오라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딱 떨어지는 말투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믿어지지 않아 거듭 아들의 이름을 대며 확인해 주기를 원했다. 재차 묻는 나로 인해 짜증이 났는지 학교 측 담당자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손을 덜덜 떨며 가뜩이나 서툰 영어로 허둥대는 나의 모습에 남편은 무언가 심각한 일임을 감지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찬 기운이 소용돌이치면서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아이는 절대라며 사고의 무풍지대로 여겼는데,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고, 인정하기 싫었다.

그럼, 당연히 내 아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야만 믿을 수 있지.’ 그 심정으로는 도저히 운전할 수 없기에 남편을 학교로 보냈다. 기다리는 동안 무언가 사무착오가 있었으리라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자신을 위로했다. ‘딱각 딱각초침 넘어가는 소리가 확성기를 들이댄 것처럼 크게 들려 오기에 가슴이 더 울렁거렸다.

한참 후에 아들과 남편이 들어서는데 서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아도 모든 일이 사실임을 인정하라는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졌다. 붉으락푸르락 해진 남편의 얼굴에서는 억지로 눌린 화가 파란 힘줄로 불끈 돋아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두 장을 내미는데 하얀 것은 학교에서 준 정학 통지서이고, 길쭉한 노란색은 경찰이 준 법원 출두 명령서였다.

하루 정학까지는 받아들인다 해도 법원까지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탁 막혔다. 평생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법원과 경찰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죄인들을 다루는 법원에 가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무슨 큰일이 생긴 거구나, 어쩐다지.’

남편과 아들 사이에 놓인 팽팽한 신경 줄이 언제 튕겨 나갈지 걱정이었다. 자초지종을 일단 들어보고 그때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텐데 직선적인 성격의 남편은 앞과 중간도 없이 결과만을 들추어내 야단칠 것은 뻔한 일이다.

부부 사이에도 자식 문제는 예민하다. 오히려 내가 엉덩이 한 대 때리는 것이 마음 편하지 남편이 야단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심할 경우, ‘그만해도 될 텐데자식 잘못 키웠다고 나에게 대한 항변인가 아니면 내가 미워서 아이를 분풀이로 삼는 것인가.’ 하는 오해를 할 때가 있다.

남편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 할 것 같아서 아들을 사무실로 데려갔다.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히스패닉이라 우리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그네들 앞에서 아들을 가운데 두고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책상 위에 두 장의 종이를 나란히 펼쳐 놓고 망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나? 처음부터 윽박지르면 주눅이 들어 사실을 축소하거나 은폐할지도 몰라. 그렇다고 가볍게 취급하면 앞으로 교육상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거야.’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얽히고설키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는 교재가 있다면 그 방정식대로 이 문제를 풀고 싶었다.

누가 누가 오래 버티나?’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각기 누르고 있던 침묵의 시간이 쌓이자 그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설명을 해봐.”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엄마가 너를 얼마나 믿는지 알 거야. 지금 너무 놀랐으니까 사실대로 말해봐. 그래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잖겠니?”

어르며 달래듯 조심스레 접근해 보았지만 다문 입은 열쇠를 거부하는 자물통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침묵이 가슴까지 차올랐을 때에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니? 말을 해 봐. 말을.”

짜증 섞인 채근을 해댔다.

말 없는 것은 남편의 대물림을 했나 보다. 씨도둑은 못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맞는가 보다. 화가 나거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며칠씩 입을 다물어 사람 속을 더 뒤집는데 인제 보니 아들도 똑같았다.

하나도 모자라서 보태주네. 나를 무시하는 거야? 엄마 말이 강 건너 부는 바람 소리만도 못하단 말인가?’

한번 불붙기 시작한 화는 점점 타오르며 그 열을 더해 갔다. 고개 숙인 아들의 정수리를 맴도는 가지런한 머리카락들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내 감정을 비웃는 듯 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더 타오를 수 없을 지경이 된 화는 눈물이라는 돌파구를 찾아 분출되었다.

내 설움에 겨워서였다. 녹록치 않은 이민 생활에 여자들은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희생이 요구됐다. 들어가나 나가나 일에 밀려 지치고 힘들 때가 많았다. 누적된 과로 속에서도 자식들 커 가는 모습에 희망을 걸고 살아 왔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일을 겪고 나니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이 허무해졌다. 자식 앞에 구걸하다시피 앉아 있는 내 처지가 처량하기도 했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계속 흘러내렸다. 무심한 듯 꼼짝 않던 아들에게 나의 흐느낌이 진동으로 전해졌는지, 슬쩍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예상 밖의 상황에 움찔 놀라더니,

엄마, 울지마. 이야기할게.”

아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담배와 라이터는 친구의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3교시에 학교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줘야 하는데 주머니에 그런 것을 소지할 수 없으니 아들에게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1시간만 가지고 있어 달라고 사정하는 친구에게 답변을 못 해주고, 망설이다 보니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단다.

손에 쥐여 주고 달아나는 친구로 인해 얼떨결에 떠맡고는 교실을 향해 허둥대며 뛰어갔단다. 그런데 마침 지나치던 학교 경찰이 제지했고, 놀라서 당황하는 모습에 몸수색하더란다. 결국 교내에서는 소지하면 안될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학교 측에서는 하루 정학을, 경찰은 법원 출두 명령서를 준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이런 황당한 일도 겪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좀 더 찬찬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자식을 믿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심정이리라. 기대치가 큰 만큼 실망의 폭도 깊기에 그 신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일단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신의 것도 아니고 친구의 편의를 봐 준다는 의도였기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원 출두 명령은 지나친 처사로 느껴졌다.

내가 일하는 가게 바로 앞의 고등학생들에게 담배 정도는 예사였다. 물건을 사고 돈을 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척일 때 보면 겁이 나기도 한다. 잭나이프, 마리화나, 직잭, 안약, 담배, 유리 대롱 등, 마약이나 범죄에 사용되는 물건들이 고개를 내밀곤 한다. 한번은 곗산대 위에 동전과 함께 권총을 올려놓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이번 일과 비교를 하자면 그들의 대부분이 범죄자요 퇴학을 받아 마땅한 일일진대 그렇지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현장에서 직접 잡힌 것도 아니고 단지 친구의 것을 맡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할 일들이 너무 벅찼다. 그렇다고 아들 앞에서 이런 내 속내를 표현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규칙을 어긴 것이기에 부모가 억울하다고 학교 측의 체벌을 반박하거나 무시를 하면 가치 기준에 혼란을 줄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 그 순간에 경찰에게 네 것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어야지.”

엄마,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어? 그리고 친구 말을 하면 걔도 혼나잖아. 그럴까 봐 나한테 부탁한 일인데.”

사정하는 아들의 눈빛에 친구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자 하는 설익은 우정이 엿보였다. 경우를 밝히면 박해지니 조금은 어수룩하게, 손해 보는 듯 살아야 피해를 보더라도 인간미를 풍긴다는 평소의 내 생각을 이때만은 적용할 수가 없었다. 자기 일이라면 포기해도 되겠지만 자식이 당하는 불이익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하루 정학이야 아들이 친구와 한 약속을 존중해 항의할 뜻이 없었지만, 법원에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법원은 재판과 연결이 되니 잘못하면 어린 나이의 학창시절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학교에 가면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같이 가서 학교 경찰을 만나자. 그래서 사실을 말하고 법원에 가는 것만은 피해야지.”

엄마 싫어. 그럼 친구는 어떻게 해?”

몇 번을 단호히 거절하는 아들의 입꼬리에 그의 의지가 물려 있었다. 왜 친구를 만나야 하는지 당위성을 설명했고, 엄마의 눈물 바람까지 봤는데도 완강했다. 융통성 없이 앞뒤 꼭 막힌 그의 성격 그대로다.

도저히 호전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들은 엄마가 자기의 뜻을 생각해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고, 엄마는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상반된 두 주장이 버텼다. 줄다리기는 팽팽히 이어졌고, 결국 한쪽이 놓지 않으면 둘 다 지쳐 제풀에 쓰러지거나 끊어져 엉덩방아를 찧어야 할 판이다.

이번에도 내가 양보를 해야 될라나 보다. 심사숙고를 한 끝에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내일은 학교에 못 가니까 모레 수업 끝나고 그 친구랑 같이 나와라. 엄마가 기다릴게. 그 애한테 그날 상황을 사실대로 적은 편지를 써 달라고 해 보자. 네 말대로 티켓은 네가 받은 거니까 할 수 없으니 친구의 편지를 법정에서 보여주는 거야. 그러면 벌을 덜 받지 않겠니? 친구에게는 아무 일 없을 것이고 너한테도 좋을 거야. 엄마 말 맞지?”

나의 간절하고 끈질긴 설득에 아들도 끄덕이며 승낙을 했다.

이렇게 벌인 신경전으로 벌써 4시간이 소비되었고 서로의 담금질에 힘이 다 빠졌다. 아들은 열이 오르는지 얼굴이 상기되었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친구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들이 힘들어해 일단 접어 두었다.

 

이틀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시간을 밀어 보내고, 약속한 날 하교 시간에 맞추어 학교 앞으로 갔다. 조금 이른 탓에 기다리는 동안 소요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나니 다른 걱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그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갱단의 일원이면 어쩌나. 성격이 과격해서 보기만 해도 질리면 어쩌나. 한국말을 모르는 타 인종이면 어쩌나. 내 앞에서는 얌전한 척 해도 돌아서서 아들에게 보복하면 어쩌나. 괜히 짧은 영어로 실수를 해 아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어쩌나. 내 아이 구하자고 남의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어쩌나. 편지를 안 쓰겠다고 버티면 어쩌나.’

어쩌나를 꼬리에 달고 이어지는 불안감에 입술이 바짝 타는 듯 했다. 그냥 재수로 돌리고 벌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걸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벌이려는 일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다른 화를 불러올지 갈팡질팡 중심이 서지 않았다. 한꺼번에 밀려 나오는 아이들 속에 아들이 보였고, 그 옆에 얌전하게 생긴 동양 아이가 나란히 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한국 아이였나?’

언어소통이 가능하리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안녕하세요?”

친구의 인사말에 일단 반가웠다.

, 그래. 지금 끝났니? 어서들 와라. 배고프니까 우선 밥부터 먹으러 가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이런 일만 아니면 둘이 꽤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가서 음식을 먹으며 일상적인 대화로 운을 떼었다.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들로 꽉 들어찼기에 자장면 가락이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나뿐 아니라 그들도 불편했던가 보다.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고 빤한 사실을 앞에 놓고 이 말 저 말 돌려대는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 음식량이 줄어들지 않았다.

아들의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아줌마가 할 얘기가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 지난번 그 담배와 라이터 말이야, 누구거니?”

제꺼예요.”

그렇구나. 이게 정학 통지서고 이것은 법원에 나오라는 명령서야.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 편지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어. 판사에게 가서 그날 있었던 일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니? 너한테는 절대 나쁜 일이 없을 거야. 너를 도와주다 이렇게 됐으니 이젠 네가 도와줘야지, 그렇지?”

.”

그 아이도 이렇게 커진 일에 책임을 느꼈는지 아무 거부반응 없이 내가 준비해 간 종이와 연필을 받아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힐끔 넘겨다보니 아들이 말한 그대로였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온 표면상의 이유로는 아들을 변호하기 위한 증빙 서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 일면에는 아들을 향한 혹시나하는 의심이 숨죽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나마 확인을 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가 많다. 하는 대로 믿고 놓아두자니 방종으로 흐를까 봐, 따지고 확인하면 소심하고 주눅이 들까봐 쉽게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이번 일도 아들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었지만, 사춘기의 호기심 많은 시기이니 무턱대고 방심할 수만은 없었다.

내 말 좀 들어보렴. 담배는 호기심에, 또 폼재고 싶어서 아니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희들은 한참 자라야 할 나이야. 담배는 몸에 안 좋단다, 알지? 담배 냄새도 나쁘지 않니? 아마 여자 친구들도 싫어할걸.”

다 쓴 편지를 받아들고, ‘어른들은 모두 똑같은 말만 해. 녹음기인가 봐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될 수 있으면 쉽고 강압적이지 않게 어설픈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하려 노력을 해 보았지만 나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리라. 당연히 잔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원인제공이야 그가 했지만 어찌 되었든 남의 자식을 부모의 승낙도 받지 않고 훈계를 하게 되어 미안했다. 후식으로 옆의 제과점에서 팥빙수를 사 먹이고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순수한 뜻도 있었지만 편지에 쓴 주소와 일치하는지, 만약을 대비해 집을 알아두려는 얕은 내 속마음도 작용되었기에 씁쓸함이 입안에 가득 차올랐다. 매 순간 상반된 마음이 공존함이 괴로웠다. 내 이중성의 존재가 확인되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마음도 차츰 안정되었다. 그날 이후로 아무 일 없었던 척 서로 간에 눈치를 보며 지냈다. 일상생활에 별 불편 없이 살아가면서 어딘가에 뚫리지 않는 체증을 안고 살아가는 듯 했다.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굳이 대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달력에 빨간 표시를 해 놓은 그 날. 117일 화요일은 밀레니엄을 외치며 호들갑을 떠는 세상과 더불어 찾아왔다. 아침 일찍 서둘러 어젯밤에 다림질해 놓은 옷을 입었다. 깔끔히 차려 입은 세 사람이 집을 나서서 차에 오르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좋은 일로 성장을 한 채 나들이하는 길이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파사데나에 있는 청소년 법원을 찾아갔다. 830분까지 오라고 명시되어 있어 서둘러 왔기에 740분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려고 많은 사람이 밀려 있었다.

안내원의 지시대로 일층 구석진 문 앞으로 가 줄을 섰다. 앞에서 세 번째. 이 순서대로라면 일찍 끝내고 돌아갈 수 있겠다는 계산을 해보았다. 정각 830분에 문이 열리고 뱀 꼬리처럼 늘어섰던 사람들이 금방 자리를 꽉 채웠다.

칸막이 처진 창구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이름을 불렀다. 도착한 순서대로 일이 처리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접수된 대로 하는 것 같았다. 일 처리가 느리게 진행되어 무료한 기다림의 시간이 늘어지기에 구경삼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갖 인종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서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여러 언어가 소곤거림 속에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복장도 자유롭게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 헝클어진 머리로 마치 옆집에 마실 나온 사람들 같은 차림새가 대부분이었다. 깔끔히 차려입은 우리와 비교가 되었다. ‘법과 관에 약해 겁부터 먹는 우리네와는 관습에서 오는 의식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옆을 보니 아들의 입술이 바짝 말라 하얗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여드름이 돋아나고 코밑에 자리 잡은 꺼뭇한 수염이 더 이상 내 손 안의 자식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까칠해진 얼굴에서 그동안 남모르게 겪은 아들의 속앓이가 느껴졌다. 자신을 철석같이 믿어준 부모를 실망시킨 데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엉뚱한 일에 휘말려 우습게 된 자신의 모습이 싫기도 했으리라.

그 일 이후로 친구와의 사이도 껄끄러워졌으리라 짐작된다. 의리와 우정으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크게 번질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어차피 현장에서 적발된 것이라 빠져나올 수 없어 포기한 이상, 친구를 덮어주려는 어쭙잖은 의협심이 엄마에 의해 반강제로 꺾였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아들이 어릴 적에 얼마나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나 마음속의 필름을 돌려보았다. 처음으로 내 몸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된 신비로움을 깨닫게 해 주었고, 12시간의 진통 끝에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갖은 재롱으로 집안의 웃음꽃을 피워 주었고, 세 살 터울의 동생에게 의젓한 형 노릇을 잘 해주었다.

외출시 동생이 화장실에 가려고 하면 그 자신도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

엄마, BoysBoy끼리 가는 거야.”

엄마의 일손을 덜어 주던 세심한 배려파였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 탓에 큰 말썽 피운 적이 없는 보증 수표파였다. 의리파이고 인정파인 것은 지난번 여름방학 때 여실히 증명했었다. 일 년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여름캠프를 그 스스로 포기했다. 그때 마침 작은아들이 아파서 눈에 안약을 하루 다섯 번씩을 넣어야 했다. 아픈 동생을 두고 혼자 놀러 가는 것도 용납이 안 되었고, 일하느라 바쁜 엄마 대신 동생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6년 동안 슬픔과 고통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을 더 많이 안겨준 나의 큰아들이었다.

바닥에 헛발질을 하는 남편의 옆얼굴에도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자기 자신의 무기력함에 자괴감이 느껴지나 보다. 언어가 다르기에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았고, 법적으로도 문외한이기에 아무 조처를 취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이 일이 있고부터 부쩍 말수가 줄고 시무룩한 표정일 때가 많았다. 한국에서라면 앞장서서 방법을 찾아냈을 텐데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답답했으리라. 자신의 문제 같으면 여기저기 수소문이라도 할 텐데 자식의 일이니 나중에라도 그렇고 그런 애로 치부될까 봐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나의 마음이 일치했다면 말이다. 손을 내밀어 아들의 손을 꽉 쥐어본다. 백 마디의 말보다 따스한 체온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주리라.

시간은 어느새 11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예약이 생활화된 미국, 줄서기에 익숙한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시키고, 세 번째였던 우리의 순서를 제치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가게 만드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시간에 가게를 닫으므로 보게 된 손해와 몇 과목 째 뺏긴 아들의 공부 시간은 어떻게 메우는가 말이다.

딱딱한 의자에서 벌서는 심정으로 앉아 있자니 엉덩이가 배겨왔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데 드디어 아들을 호명했고, ‘Room C’ 하며 간단히 지시를 내렸다. 옆문을 지나 진찰실처럼 쭉 늘어선 방들 사이에서 ‘C’를 찾았다. 큰 숨을 몰아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슬쩍 잡아 보았다.

. .”

노크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두드린 내가 더 놀랐다. 살짝 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TV에서 보던 큰 법정이 아니었고, 책상 뒤로 권위적인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 판사의 포근한 모습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

부모는 대기용 의자에, 아들은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개인 신상명세서를 확인하고 경찰이 올린 보고서 내용을 읽었다. 가만히 수긍하는 아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식에 대한 어미의 보호 본능이리라. 핸드백 속에 챙겨온 아들 친구의 편지를 꺼내 판사 앞에 내밀었다.

우리 애는 억울합니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단숨에 시원히 읽어 내려간 판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부드럽지만, 그러나 거부 못 할 어투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드문드문 아는 단어를 조합해 대강 이해하며 넘겼다. 이런 상황에서 나올만한 틀에 정해진 말들이라는 판단 아래에서였다.

결론은 벌금 245불을 내든지 금연수업을 10시간 들어야 한단다. 석 달 후까지 교육을 받은 증서를 제출하면 되고, 만약 기간을 어기면 자동으로 벌금이 부과된다는 당부로 싱겁게 끝이 났다. 우리가 두 달을 서로 간에 내색도 못하고 마음 졸였던 고통과, 3시간 넘게 일초일초 세어가며 기다렸던 조바심을 단 20분 만에 끝내 버린 것이다. 더 나쁜 판결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심보다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드는 내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들이 고심했던 그 일들이 경고로 끝나는 정도의 사건이었나 보다.

정말 가도 되나요?”

되묻는 실수를 범했다.

그럼 여기서 살래요?”

멋지게 맞받아 농담하는 판사를 뒤로하고 얼른 일어났다. 다른 사건으로 착각했다며 붙들까 봐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벌금을 지불하고 주차장에 있던 차에 오른 뒤에야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에 지금까지 숨어있던 헛증이 밀려들었다. 두 번 다시 이런 곳에 발걸음을 돌릴 일이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오전과는 다른 침묵이 흘렀다. 밀린 숙제가 해결돼 가뿐한 마음이 되었으니 그동안 무거웠던 감정을 추스르도록 누군가 물꼬를 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 역할을 아들이 해낸 것이다. 아무래도 아빠는 어렵고 쑥스러웠던지 그 대상으로 나를 택했다.

아들이 준비한 음악으로 그 동안 힘들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사랑의 리듬을 타고 잦아들었다. 이어폰을 통해 나눈 화해, 용서, 다독거림, 다짐. 이 소중한 느낌들이 흘러 나가지 못하게 양손으로 살짝 귀를 감쌌다. 마치 아들을 내 품에 안 듯이.

작은아들의 숨은 배려 또한 힘이 되어 주었다.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동생에게 나름의 권위가 있는 큰아들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쉬쉬 하며 숨겼었다. 그 애도 집안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과 안쓰럽게 바라보는 서로의 눈길에서 피부로 와 닿는 낯섦을 눈치 챘을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보통 때와 다른 복장으로 나란히 나서는 우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궁금한 기색을 동그란 눈 안에 잠시 내비쳤지만 이내 묻지 않았다. 그래서 궁색한 변명이나 거짓말을 둘러대어야 하는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아들이 들려준 노래 안에 있었듯이, 늘 함께 있어 소중한 걸 몰랐던 가족들은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다져지고 뭉쳐진다. 사랑과 믿음, 신뢰와 인내, 용서와 화해가 한데 어우러지는 곳, 힘든 일은 나누고 기쁜 일은 보태어지는 곳, 바로 가정이다. 비 온 뒤에 무지개가 떠오르듯이 아픔 뒤에 느껴지는 사랑은 더 깊고 끈끈한 언약으로 새겨진다.

좋은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을 집에 내려주며 한마디 했다.

사랑해!”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