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읽어낸 추억

 

 

떠올릴 추억거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서점에 들렀다가 잊힌 듯 했던 기억 저편의 시간이 생각나 뜻밖에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큰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해서 일을 마친 늦은 시간에 온 가족이 서점으로 나들이를 했다. 평소에 같이 즐기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다른 곳도 아닌 서점이라는 유혹에 가라앉는 눈을 비비며 따라나섰다. 영어권이 아니기에 내가 읽을 만한 책은 없겠지만 오랜만에 책 냄새를 맡고 싶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서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히 쌓였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여유롭게 진열되어 있었다. 특유의 잉크 냄새는 진한 커피 향에 파묻혀 내가 온 곳이 어디인가 두리번거리게 했다. 그 진원지로 한구석에 간단한 간식거리와 커피를 파는 곳이 있고, 그 앞의 여러 테이블에 사람들이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CD가 장르별로 진열되어 있고, 헤드폰까지 비치되어 음악 감상도 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눈요기나 할 겸 잡지를 들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까지 한 잔 앞에 놓으니 세상의 걱정이 모두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책과 음악과 커피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이다. 그때까지 어깨를 내리누르던 피곤이 자취를 감추고, 책 안의 푸른 초원 위로 그리운 시간이 그림처럼 겹쳐졌다.

 

결혼 전에는 거의 모든 약속은 종로로 정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 교보문고를 시작으로 몇 군데 서점을 유랑하는 것이 나의 취미이자 습관이었다. 책 읽는 것이 좋아서 속독을 배웠기에, 연습도 하고 공짜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작전을 세운 덕이다. 일명 얌체족의 대열에 자청해서 끼어들어 간단한 베스트셀러 류 한 권 정도는 두세 군데 돌며 연결하면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속도도 빨라졌다.

내가 서점을 찾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 당시 나는 유치원 교사였다. 틀에 짜여 몇 년째 활용되는 교재보다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싶다는 사명감에 들뜬 초년병 시절이었다. 동요나 공작 또는 아동교육에 관련된 서적을 보니 겹치거나 비슷한 부문이 많아 막상 사려고 하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노래 한 곡을 위해서, 색종이 접기 하나가 필요해, 이야기한 부분이 필요하다고 사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경제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필수품은 오선지가 그려진 음악 노트와 필기 용품이었다. 서점에 들렀다가 필요한, 혹은 새로운 창작 동요를 오선지 위에 대강 옮겨 그리고, 다른 것은 요점을 정리해 적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정서해 놓으면 필요한 때에 요긴하게 쓸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것을 가르칠 수 있어서 흐뭇했다.

처음에는 속도가 늦고 양심에 걸려 종업원의 눈치를 꽤 보았다. 한 곳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어 여러 곳을 옮기며 다음 부분을 이어 나갔다. 열심히 베끼고 있는데 종업원의 차가운 그림자가 노트 위에 드리워져 다급하게 돌아선 적도, 다음을 연결하려고 그 옆 서점에 갔다가 똑같은 책이 없어 허탕을 치기도 했다.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땀을 흘린 적도 있었다. 약속장소에 안 나타나는 나로 인해 친구들이 나누어 서점으로 찾아 나선 적도 많아 그 벌로 커피 값을 내는 담당이기도 했다. 책값을 절약한 대신 커피값이 나갔으니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한 것인지 아닌지 아직도 계산되질 않는다. 득과 실을 눈에 뜨이는 수치로 계산하기 이전에 무형의 재산을 더 많이 얻었다 생각하고, 몰래 한다는 재미와 무언가에 몰두해 빠져들 수 있었다는 것이 돌이켜보니 너무나 소중하다. 사는데 허덕이는 지금의 나에게 그런 열정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요즘은 한국의 서점가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북 카페라는 새로운 형태의 상점들이 많이 생겼으리라 짐작한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책이나 잡지를 읽는 사람을 보니 그 시절에도 이런 여유로운 공간이 있었다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눈치를 보느라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리오금이 저리도록 쭈그리고 앉아 베끼지 않았을 텐데, 오른손 가운데 있는 손가락에 딱딱한 군살도 생기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들이 싱겁고 평범했다면 살아가는데 활력소를 잃었을 것이다. 뜻하지 않는 장소나 사건들에 이끌려 나온 추억은 잔잔히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하고, 메말라 가는 감성을 깨워준다. 떠올려지면 꺼내보고 다시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는 내 마음속의 보석 상자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커피 한 잔을 입안에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이 순간을 나중에 되돌아보면 어떤 그림으로 떠올려질까, 매일매일 추억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산다면 무의미하게 보내지는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