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와 20불

 

세라가 아프다. 몇 년 전에 앓던 간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었단다. 집 앞에서 마주친 그녀의 딸은 본인에게 아직 알려 주지 못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쩐지 지난주에 자식들이 들락거리며 분주했었다.

세라는 히스패닉으로 나이는 60 중반인데 보기에는 70이 넘어 보인다. 키는 내 어깨에 올 정도로 아담했고, 꾸부정한 등에 항상 회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얽히고설켜 지저분하다. 지팡이에 체중을 반쯤 의지한 채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노인처럼 무심한 듯 집 앞에서 먼 산 건너다보는 것을 즐긴다.

어느 날 차를 세우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그녀가 내 뒤에 있었다. 마침 장을 봐 오던 길이라 봉투에서 한국산 배 두 개를 꺼냈다. 사과처럼 껍질을 깎아 먹으면 된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세라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배를 받아 들었다. 다음날 달고 맛있는 과일이라는 인사와 함께 오이 2개를 건네주는 것으로 우리는 이웃사촌이 되기로 무언의 언약(?)을 맺었다.

친해지자 그녀는 가끔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거리가 먼 상점에 가서 자신의 속옷 대용 기저귀를 사야 한다든가, 맥주나 우유 등 무거운 물건들이 필요할 때 차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세탁물을 끌고 서너 블록의 유로 세탁장으로 가야 하는 불편함을 이제 우리 집 세탁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그리고 매달 초에 받는 정부 보조금이 떨어질 18일쯤 되면 “너에게 이런 말하기 미안하고 힘들지만 20불만 빌려줘.”라고 부탁한다. 처음에는 20불이더니 차츰 불어나 한 달이면 보통 100불 정도 가져갔다. 월초가 되면 큰 미소를 머금고 돌돌 말은 돈을 내 손에 쥐여 준다. 몇 달 반복하다보니 이젠 아예 그녀가 준 돈을 따로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준다. 그 돈이 내 돈인지 세라가 맡겨둔 돈인지 경계선이 흐려져 버렸다.

세라는 별식을 만들거나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벌벌 떨리는 다른 손에 접시를 들고 힘겹게 문을 두드린다. 가끔 자녀들이 영화를 보라고 가져다주면 나에게 먼저 보라고 빌려 준다. 크리스마스에는 딸이 그네들의 명절 음식인 옥수수가루로 만든 타말레스를 가져온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이웃사촌 더 좋다. 더욱이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어 친하게 지냈는데, 그녀에게 닥친 불행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지 않아도 두 달 동안 장례식에 세 번이나 다녀와 우울해 있었는데, 좋은 친구를 하나를 더 잃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슬펐다.

지난달 초에는 60세인 시누이 남편 토마스를 잃었다. 그는 은퇴한 후 집에서 정원 가꾸는 것이 취미였다. 금요일 날 뒤뜰의 나무를 정리하다 손가락을 베었다. 당뇨와 고혈압 때문에 약을 먹긴 했어도 그리 건강이 나쁜 편이 아니고, 가끔 있는 일이라 집에서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단다. 주말을 보내며 상처 부위가 가라앉질 않아 월요일에 병원에 갔다. 이미 파상풍 독이 몸에 다 퍼져 다음날 너무도 허무하게 눈을 뜨지 못했다. 가족들은 금방이라도 그가 두 손에 붙은 흙을 툭툭 털며 거실로 들어설 것 같다며 믿어지지 않은 현실 앞에 망연자실했다.

지난 달 동갑인 필리핀 친구 조니의 엄마 장례식이 있었다. 의붓아버지가 후두암이라 수술을 해서 그녀의 엄마가 그의 병간호를 했다. 어느 날 그녀의 엄마가 힘에 벅찼던지 쓰러지셨단다.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손 쓸 새도 없이 투병 중인 아버지를 뒤로하고 엄마가 먼저 가족들 곁을 떠나갔다. 아버지도 시한부인 상황인지라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지난주에는 전 직장동료의 아버지인데, 노환으로 편안하게 가셔서 그나마 모두 호상이라 했다.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세라에게 병마가 찾아들었다. 그녀의 순한 미소가 떠오르며 마음이 아팠다. 재발이 된 것이라면 수술도 힘들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현재의 상태만으로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통증을 잊기 위해서 맥주를 그리 마시는가 보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 차편이 필요할 때 흔쾌히 운전기사가 되어 주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누어 먹어야겠다. 그녀의 집에 들러 하루에 10분이라도 말동무가 되어 주어야지. 좋은 영화를 빌려와 그녀와 돌려봐야겠다. 때로 엉뚱한 친절과 작은 선행을 실천하다 보면 기분 좋은 충격에 사로잡힐 것이라지 않은가. 간단한 몇 가지로 병든 이웃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자신도 행복해질 것이다.

당장 실천해야지. 며칠 전 그녀가 스파게티를 담아다 준 접시를 들고 세라를 방문했다. 노크하고 문고리를 돌리며 ‘울면 안 돼. 그녀에게 눈물을 보이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어금니를 앙 물고 억지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불쌍한 세라. 잠시 날씨 이야기 등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접시를 돌려주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숙! 나 20불만 빌려줘.” 순간 내 머릿속은 생각들이 빛의 속도로 발사되었다. 20불? 벌써 이번 달은 80불이나 빌려 갔는데. 더 줘야 하나 아니면 없다고 해야 하나. 속마음을 들키기 싫어 눈길을 아래로 향했다. 접시는 내 두 손과 그녀의 한 손에 잡혀 팽팽한 신경 줄에 걸린 채 허공에 떠 있다. 순간 접시 바닥에 달라붙은 얄팍한 나의 인간성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안쓰러워 흘린 눈물이 아직 손등에서 마르지도 않았는데….

얼른 접시를 그녀에게 밀어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20불이 지금 있던가? 당연히 빌려줘야지 무슨 말씀을. 세라가 아픈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