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셔츠

큰아들Andy의 셔츠를 손에 들었다. 몇 년 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인데, 그가 좋아하는 ‘개미 밴드’Anticon의 것으로 앞에는 그룹의 이름이, 뒤에는 여러 마리의 개미가 인쇄되어 있다. 그 옷을 받아들고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낡기도 했지만 하얀색은 흔적도 없어지고 온통 때에 절어 회색이다.

다니러 온 두 아이의 옷매무새를 보며 한심해 하다 다음에 올 때는 빨랫감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학교 다니면서 아빠의 일을 돕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남자 세 명이 살다 보니 누가 알뜰살뜰 챙기겠는가. 어찌 보며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에 “꼭꼭”을 강조하며 명령조로 말했다.

큰 아들은 몇 번을 거절하다 빨랫감을 한 바구니 가지고 왔다. 색이 짙은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하얀 것들은 구제 불능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후 화장실로 들어가 아들의 옷을 코에 대고 체취를 맡아본다. 홀아비 냄새라는 남자의 독한 향이 코를 찌른다. 그렇지, 벌써 23살이지. 애가 애를 낳는다고, 첫 아이를 뱄을 때 주위에서 모두 걱정을 했다. 임신 6개월 되었을 때도 몸무게가 늘지 않아 담당 의사에서 야단을 많이 맞았다. 잘 먹어야 영양이 아이에게 가는데, 태아가 자라지 않고 있다며 다음 올 때는 코끼리처럼 되어 오라고 정기 검사 때마다 당부했다.

체중 미달로 태어난 아이는 예상외로 건강상태가 양호했다. 인큐베이터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노란 피부색에 조그마해서 ‘피넛’이라 불렸다. 미국인들이 사는 지역이라 다른 층에서 일하는 간호사들까지 아이 구경을 왔다. 아기는 낮과 밤이 바뀌어 저녁 10시만 되면 깨어나 밤새 울었다. 초보엄마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서 그냥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백일이 지나니 순한 아이가 되어 지금까지 큰 말썽 없이 잘 자라준 고마운 큰 아들Andy다.

이제 그 아이가 남자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키도 커서 엄마를 내려다보며 능글맞게 농담도 제법 한다. 대야에 비누를 풀고 옷을 담근 후 주물러 빨았다. 검은 구정물이 한없이 나와 몇 번 물을 갈면서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뚝뚝 떨어지며 비눗방울을 터트렸다. 눈물이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아이의 옷을 빨면서 그동안 엄마의 손길을 얼마나 필요로 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 부모의 불화를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나보다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옷에 스며드는 비눗물처럼 엄마의 사랑이 상처의 곳곳에 스며들어 말끔히 치료해 주었으면 좋겠다. 때를 분리해 내듯 마음속에 젖어 있던 외로움과 슬픔을 비눗방울방울이 모두 떼어내 주기를 바란다. 정성을 다해 구석구석 빨았다. 엄마의 책임을 다하지 못함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으로, 깊이 새겨진 아이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고 깊은 슬픔의 그늘이 가셔지기를.

일을 나가면서 비눗물에 담그고, 아침이면 다시 빨기를 3일 동안 했다. 표백제에 넣으면 깨끗해질 수 있겠지만, 손으로 문질렀다. 인쇄된 그림이 탈색이나 변색하여 아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큰 아픔과 실망을 주고 작은 것은 지켜 주려는 내가 우습지만, 그러고 싶다. 이 또한 내 스스로 위안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겠지.

빨면 빨수록 색이 변하는 아들의 회색 셔츠로 인해 행복하다. 조금이나마 엄마의 도리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원치 않는 상황에 부닥칠 수가 있다. 그 위기를 어떤 방법으로 이겨 내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지난 몇 년을 어려운 시간을 겪었으니 이제는 성숙한 모습으로 서로를 지켜 주고 보살펴 줄 수 있으리라.

빨래 한번 해주면서 무슨 생색이냐고 자신을 질타하지만, 내일 아들이 오면 회색을 벗어던지고 하얗게 변한 셔츠를 보여 줄 것이다. 달라진 옷을 보고 좋아할 모습을 상상해본다. 때가 빠진 옷 안에서 엄마의 사랑과 표현하지 못했던 아픔,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그도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청바지를 가져오라고 해야지. 세계지도를 그린 듯 얼룩진 바지를 솔로 쓱쓱 문질러 깨끗이 만들어 줘야겠다.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이기고 바르게 자란 아들이 고마워서. 그리고 변함없는 엄마의 사랑을 전해야겠기에 장갑 안 낀 맨손으로 빨아 주련다. 피부로 직접 느끼고 또 전해야지, 변할 수 없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큰아들 Andy의 셔츠를 가슴에 꼬옥 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