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그 화려한 시간
흥겹지만 요란스러운 파티다. 블랙홀에서 튕겨져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방금 나온 ‘파스타 하우스Pasta House’를 돌아보았다. 입구에는 아직도 많은 젊은 남녀들이 들뜬 모습으로 입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다. 저들에게는 오늘 이 자리가 청춘을 불사르는 광란의 밤이 되겠지. 친구와 둘이 마주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작년 1월 초였다. 단골손님인 경찰 리처드가 새해맞이 파티를 한다며 초청장을 주었다. 경찰들과 소방대원, 법원 관계자이 모인다고 한다. 바로 건너편에 경찰서와 법원이 있으니 그런 자리에 나가면 상점을 알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친분을 쌓아 놓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얕은 속셈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신년을 맞이하는 파티. 시무식을 겸한 자리일 것이다. 알알이 부서지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넓은 연회장, 하얀 수건을 걸친 웨이터들이 시중을 들 것이다. 연단에는 고위 관계자가 올라가 새해를 맞는 인사와 격려를 해줄 것이고, 올 한해의 계획을 발표하겠지. 옷장 속에서 몇 년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복을 깨워야지. 전통의상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으로 눈길을 끌며 ‘Korea’를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국위선양까지 일석 삼조다.
기다리던 파티 날. 6시 정각에 도착한 파스타 하우스Pasta House.입구에는 평소 안면이 있는 경찰들이 사복차림으로 입장권과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두 개의 큰 홀로 나누어져 한 면으로는 길게 바-Bar-가 늘어서 있었다. 춤을 출 수 있는 무대와 함께 DJ가 음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한두 명씩 입장을 하는데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상했던 파티와는 간격이 멀어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동양인이라 눈에 띄는데 긴 한복에 머리까지 올린 모습이 요란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리 드레스 코드와 파티의 취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나의 불찰을 탓해야지 어쩌겠나. 꿔다 논 보릿자루 같은 내 모습이라니. 상점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돌아오는 길이 무너진 기대치의 몇 배로 멀게 느껴졌다. 주위에 자랑삼아 떠벌여 놓아 며칠 동안 나의 실수담은 여러 사람을 웃게 만들었다.
올해는 갱단 단속반이 주최를 하고 팀원들이 바텐더가 된다며 새로 제작한 셔츠와 초청장을 가져왔다. 마침 놀러 왔던 친구가 미국사람들의 파티에 가본 적이 없으니 데려가 달란다. 대신 맛있는 저녁식사를 사겠단다. 인심도 쓰며 폼도 잡고, 초대받은 인사차 잠시 들리기로 했다. 흥분한 그녀에게서 작년의 내 모습이 떠올라 돌아서서 씨익 웃었다. 올해도 일석삼조가 아닌가.
느지막이 저녁 9시쯤 도착했다. 입구에 있던 경찰 리즈의 도움으로 줄서 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친구와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파티 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사람들을 헤치며 겨우 바에서 일하고 있는 마틴을 만났다. 음료수 두 병을 공짜로 얻고 의자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렸다. 시끄러운 음악이 꽝꽝 천장을 울리고,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리듬에 튕겨져 이리저리 날아다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대에는 젊은 남녀들이 짝을 이뤄 라틴음악에 맞추어 정열적으로 춤을 추었다. 둘이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둘이 되며 온몸을 흔든다. 나이가 한창 때인 20~30대의 젊은이들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저 나이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 결혼과 함께 시작한 이민생활은 젊다는 패기와 도전으로 밀어 붙이기에는 버거웠다. 시어른들과 같이 살며 자식들 키우는 일상에 휘둘리다보니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잊고 살았던 세월이다.
꿈과 이상은 시행착오와 현실이라는 타협점을 넘으며 스르르 사그라졌다. 그저 적당이라는 선을 그으며 그럭저럭 살아냈다. 일탈을 꿈꾸기도 했었지. 아우르는 모든 울타리를 벗어나 잠재된 능력을 펼쳐 보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거리기도 했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볼 때는 두 주인공의 짧기에 더 짜릿하고, 미래가 없기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에 나를 살짝 심어 보기도 했지.
다시 풋풋한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지 않을까. 막연한 아쉬움이 강렬한 리듬에 실려 날아왔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그립고, 후회로 남는 시간들이다.
싱그러운 그대들이여, 다 때가 있는 법이니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겨라. 젊음은 머물지 않으니 삶의 절정에 서 있을 때 후회 없이 사랑하라. 흔들어라. 온몸으로 느껴라. 감사하라.
눈앞에 펼쳐지는 젊음의 향연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그 안은 용광로 같이 뜨거워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슬쩍 몸을 움직여 보았다. 리듬과는 따로 노는 엇박자라 누가 볼세라 얼른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럼 그렇지. 시간은 이미 흘러버린 것을. 잠시 젊음과 어울리려 했지만 역시 우리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기에 멋쩍고 어색했다. 이제 돌아가야지. 다 때가 있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