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유리교회’는 태평양을 품에 안고 팔로스버디스의 언덕 위에 서 있는 명소이다. 벽과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Wayfarers Chapel’이라는 이름보다 ‘유리교회’로 불린다. 삼나무, 노간주나무, 소나무 주위에 선인장, 장미, 백합, 철쭉꽃 등이 피어 있다.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십자가 탑이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커피 한잔 들고 나무벤치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평화롭고 운치 있는 장소다. 그래서 오래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올인’의 촬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 교회를 온 것은 아니다. 엄마가 한국에서 다니러 온 언니들과 함께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셨기에 바람도 쐴 겸 나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30분 떨어진 샌 페드로 시의 야트막한 언덕 위, 한국에서 보내온 범종이 걸려 있는 ‘우정의 종각’에 들렸다. 내친 김에 올케언니의 제안으로 25년 전 결혼식을 올렸던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결혼식 날은 범종처럼 먼 바다 너머 고국을 그리워하며 홀로 버티었다. 번진 화장을 고쳐줄 가족도, 엉킨 드레스 자락을 펼쳐줄 친구도 없었기에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마음 둘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허둥댔다. ‘웃어라! 혼자라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고 환하게 웃어야 돼. 그래야 엄마 딸이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는 길이야.’ 전날 한국에 계신 엄마가 전화로 해준 말이 생각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외로움을 안으로 삭히며 환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가 ‘가장’이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곁에는 항상 엄마가 계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대표로 지역 웅변대회에 출전했었다. 많은 청중에 놀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 우물거렸다. 장내 분위기가 찬물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엄마가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서기에 용기를 얻어 무사히 마치고 장려상을 받았다. 초경을 시작하던 날, 큰 병에 걸려 죽나보다 하고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두려움에 떨 때 엄마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다. 가장 아팠을 때, 행복 했을 때, 또 부끄러운 순간에도 엄마는 내 주위에서 내편이 되어 주었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한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삶을 꾸리는, 두렵지만 희망에 부푼 의식이다. 눈물 찔끔거리면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야 됨을 깨닫는 날이다. 문을 나서면 동서남북도 구분이 안 되고, 누군가 가까이 오면 자라목처럼 주눅이 드는 낯선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는 날이기도 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소중한 날이기에 엄마의 빈자리가 나를 더 슬프고 외롭게 만들었다.
엄마는 그날 하루 종일 집의 옥상에서 지내셨단다. 잔병치레를 많이해서 늘 안쓰러웠던 딸을 먼 미국으로 보낸 것이 마음 아파 결혼 승낙 한 것을 후회하셨단다. 혼자 결혼식장에 서 있을 쓸쓸한 모습을 그리며 막내둥이 있는 곳이 동쪽이냐 서쪽이냐고 물으며 식사도 거른 채 하늘을 바라보며 거의 두 달 내내 우셨단다. 가족들은 넋을 놓은 엄마의 모습에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긴 줄 알고 걱정을 했단다. 같은 하늘 아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딸은 서로를 그리워했다.
성덕대왕신종을 본 따 만든 범종도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펄펄 끓는 쇠 항아리에 아기를 넣어 종을 만들었기에 울릴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 아기 울음이 섞여 나왔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종.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과 한국의 선녀가 손잡은 상징을 가슴에 새긴 채 실려 온 그녀. 소금기 절은 바람을 맞으며 낯선 생활의 어려움 속울음으로 바다에 던졌겠지.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한숨으로 삭혔으리라. 이제 한고비 넘겼나 싶으면 다시 또 달려드는 파도에 잠겨버린 꿈과 열정이 안타까워 장탄식을 늘어놓지 않았을까.
자식을 키우며 엄마의 마음을 읽게 될 때마다 그 냄새가 그리워, 포근했던 그 품에 안기고 싶어, 붉은 노을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범종에 덧입혀진 세월의 흔적만큼 연륜이 쌓여 적당히 버릴 줄도 알고 받아주는 아량도 생겼다. 잔바람에는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다.
몸이 불편하신 엄마는 눈앞에 펼쳐진 계단을 보고 자신 없으니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자 걱정하지 말고 언니들을 따라가서 사진 찍으라고 등을 떠미는 엄마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25년 전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예요.”
엄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며 내 양손을 모아 꼭 잡으셨다.
PV 산 동네 살때는 내일로 미루다가 가보지 않던 곳,
아름답고 드라이브 길이 시원한 곳, 태평양을 눈 아래 둔 거만한 경치-
Chapel이 아름답고 조경도 아름답고 해풍도 아름답고......
25년전 수줍은 신부, 오늘은 훙륭한 수필가 그리고 엄마는 늙으시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엄마와 딸!
여운이 찌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