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이 있는 다리에 서서

이현숙

 

다리 위를 걷는다. 밑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언뜻언뜻 나무 상판 사이로 보이는 물은 크렁크렁 동물의 신음소리를 낸다. 며칠 동안 태풍이 불고 비가 오더니 불어난 물줄기를 감당하기 힘든가보다. 지금도 이슬비가 뿌리는데 그 무게가 더 보태어지리라.

오하이오의 하퍼필드 커버 브릿지Harpersfield Coverd Bridge에 왔다. 그랜드강grend river위에 세월을 걸머지고 의젓하게 서 있다. 다리 위에 지붕이 있다. 미국에서 아직도 차의 운행을 허용하는 16개 커버 브릿지 중의 하나인데 왕복차선이라 폭이 넓다. 1868년에 만들어지고 1913년에 홍수로 부서진 북쪽 부근의 3분의 1은 철교로 다시 이었단다.

발자국을 조심스레 떼어 놓는다. 지붕에 난 구명을 비집고 들어온 빗방울이 머리에 내려앉는다. 무심코 잡은 다리의 기둥은 시간의 먼지가 두르고 있어서인지 끈적거린다. 순간 오래전에 본 영화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오른다. 여자 주인공인 프란체스카가 설레는 마음으로 로버트에게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메모지를 붙이던 다리의 기둥. 혹시 그 흔적일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남편과 아이들이 여행을 떠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가정주부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는 길을 묻는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 로즈먼 다리의 사진을 찍기 위해 메디슨 카운티를 찾은 사진작가였다. 무료한 일상사에 지쳐 있던 그녀는 친절하게 동행하며 위치를 알려준다.

꿈이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기쁘다는 그 남자.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흘간의 꿈같은 사랑. 이미 중년에 이른 그들은 그 동안 살아온 시간을 나누지는 못했어도 앞으로 살아갈 시간만은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메디슨 카운티에 남기로 결심한다.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기로 결정한 순간, 어떤 면에선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지만 사랑이 멈추는 때이기도 하다는 그녀. 지극히 평범한 원피스 드레스 자락을 너풀거리며 그가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보던 모습. 앞섶에 줄줄이 달인 단추가 사회적 통념을 나타내 보인 것 같아 답답하더니 결국 그녀를 주저 앉혔다.

이 오묘한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한번 찾아온다며 애틋한 눈길로 애원하던 남자.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로버트가 죽은 후 로즈먼 다리에 뿌려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뿌려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두 배우의 절제된 절절함이 애틋한 사랑을 더 빛내 주었다.

삐꺽 거리는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선다. 만약 나에게 프란체스카 같은 일이 생긴다면. 자동차 손잡이를 꽉 움켜지고 갈등하던 그녀의 고뇌어린 표정이 떠오른다. 다리 저편에서 퍼져오는 한 줄기 빛을 따라 갔다면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다리를 건너면서 꿈은 꺼지고 현실에 맞닥트리지 않았을까.

나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실패였다.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사랑 받기를 꿈꾼 내 탓인가. 인정받기를 원하는데 쉽지 않은 삶의 벽에 부딪치며 번번이 주저앉는 남자가 문제였을까. 결혼과 이민이라는 커다란 등짐을 동시에 짊어지었기에 더 허덕였는지도 모른다. 이해하기보다 ‘왜’라는 의문부호를 서로에게 던지다 보니 틈이 벌어지고 아물만하며 다시 상채기를 내다 갈라섰다. 오히려 프란체스카처럼 무료한 결혼생활이라면 나름대로 견뎌내지 않았을까.

모두는 현재의 사랑이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아니라고 로버트는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그에게 반기를 든다. 사랑은 처음과 마지막으로 나눌 수 없다고. 다시 시작한 사랑이 깨닫게 해 주었다. 큰 시련을 겪어 보았기에,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이번에는 배려와 양보 그리고 존중으로 지키려 한다. 현재하는 사랑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충실해야 하리라.

지붕을 올려다본다. 눈과 비, 그리고 바람으로부터 나무로 만든 상판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붕을 만들었단다. 어디 다리뿐일까. 거친 세파로부터 바람막이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중년이라는 나이 탓인지 위험한 열정을 택하기보다는 변화 없는 평범한 삶을 바란다. 의무와 책임이 동반된 안정이 좋다. 가끔 몸 안에서 호랑나비가 날개 짓하며 훨훨 일탈을 불러 일으키려하면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리라. 프란체스카가 되어 찌릿한 사랑을 즐기면 되리.

누군가 나를 부른다. 뒤를 돌아다보니 다리 저편에 남자가 서 있다. 그동안 다리 주변의 경관을 사진기에 담느라 바삐 움직이던 남편이다. 사진기가 나를 바라본다. 다리의 기둥을 잡고 포즈를 취한다.

 

그래, 그가 나의 지붕이다.

 

다리.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