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나는 갈 길이 멀다 / 성민희
모처럼 한가한 시간. 숙제를 미뤄둔 것 같은 마음에 여기저기에서 보내온 수필집들을 모두 꺼냈다. 책상 위에 고이 모셔진 책은 물론, 누런 봉투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이삿짐 차에 실려 먼지를 뒤집어 쓴 것 까지 합치니 모두 6권이나 된다. 봉투를 뜯고 책을 꺼낸다. 잘 아는 문인도 있고, 처음 보는 이름도 있다. 그들의 삶과 생각의 한 부분이 이 속에 있다는 사실에 한 편 한 편을 빨리 읽어보고 싶다.
수필집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먼저 집는다. 첫 작품부터 읽어 내려간다. 봄바람에 마음이 설레 집을 나왔다 한다. 금새 봄풍경이 그려진다. 꽃도 그리고 하늘도 그리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까지 자세히 그린다. 수사가 너무 화려하다. 고운 단어의 조합 같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경제적으로 힘든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그 를 대하는 작가의 행동과 친구의 반응이 뭉클한다. 그런데 뒷마무리에 너무 힘이 없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지겨운 작가의 사설에 묻혀 버린다. 너무 아쉽다. 남편과 싸웠다고 한다. 부부간의 정은 운운... 흥미가 조금 떨어진다. 남편 자랑이 은근히 시작된다. 더 읽고 싶지가 않다.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다.화가 소개가 있다. 인터넷만 뒤지면 우박처럼 쏟아져 나올 정보들을 알뜰히도 나열하고 있다. 또 덮는다.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며 생각한다. 내 작품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있지나 않을까. 갑자기 마음이 움칫한다. 이번에 문학캠프 강사님의 수필 강의 내용을 듣고 나니 글쓰기에 자신이 더 없어진다. 현재 한국에는 수필 월간지가 4권, 격월간지가 3권, 이외에 계간지가 10권이 넘고, 연간지와 부정기적인 동인지들도 있다고 한다. 거기에 걸맞게 수필가 숫자도 3200명을 웃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많은 수필이 모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지구 위 71억 인구의 얼굴 생김새가 제각각 다르듯이 그들의 이야기도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다른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르게’ 풀어서 그 만의 독특한 색깔로 ‘다르게’ 표현해 낼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나의 글쓰기 소재는 거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건져진다. 살다보면 흰 광목에 물감 쏟아지듯 초록색, 회색, 혹은 보라색 물감이 내 마음 바닥에 철퍽 쏟아지는 느낌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이 촉촉하게 마음을 적셔 쉽게 사라지지 않거나, 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지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러면 간단한 메모를 한다. 운전 중이거나 메모를 할 처지가 못 되면 녹음을 해 두기도 한다. 주제는 그때 이미 정해진다.
소재의 의미화로 나름대로의 채도와 명도를 가진 밑그림이 그려지면 컴퓨터 앞에 앉는다.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란 것은 휘발성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가면 서서히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글쓰기를 시작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놓친 아까운 그림도 많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소재의 색깔에 따라 수미쌍관식으로 갈까 아니면 시간 순서대로 나열할까? 어떤 식의 구성을 해야 효과적일까를 결정한다. 그리고 글의 시작은 되도록 짧은 문장을 쓴다. 쉽게 독자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특이한 내용이나 의문을 갖게 하는 문장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런 다음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문장은 튀지 않는 어투와 쉬운 단어로도 충분히 밀도 있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고민한다 .여기에서 나는 또 한번 더듬거리며 나아가지 못 할 때가 많다. 나의 어휘력 부족은 항상 못마땅하다. 어떤 수필가는 사전을 펴놓고 통째로 외울 작정으로 공부한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은 항상 나를 괴롭힌다. 한자말이나 외래어는 순수 한국말이 없을 때만 사용한다.
프랑스의 시인 프란시스 퐁주는 '물컵'을 쓰기 위해 6개월 동안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물이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는 물을 컵에서 따루었다가 다시 붓기도 하고 담긴 물맛을 음미해보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이 사물의 내부로 들어감으로써 그것이 스스로 표현하기를 기다리면 그 사물은 침묵을 깨고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문학적 상상력이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으로 살려 내 글의 맛을 더하고자 한다. 상상력과 기억의 편린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도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인문학 계통의 책을 읽으며 brain storm을 시킨다. 가끔이지만 그래서 막힌 문맥이 뚫릴 때도 있다.
작품이 완성되면 퇴고에 많은 정성을 쏟는다. 반복되는 문장이나 단어, 조사가 있나 찾아내고, 쓸데없는 수식어 형용사나 부사를 걸러내고, 만연체 문장은 될수록 짧은 문장 둘이나 셋으로 쪼갠다. 사용한 단어도 더 적합한 단어가 없을까 고심한다. 격조 있는 단어 하나가 문장 전체의 품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어색하여 이리저리 분칠을 해도 태가 나지 않는 문장은 문맥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과감하게 버린다. 이렇게 하여 완벽하게 다듬었다 싶은 글도 하루를 묵힌 뒤 다시 읽어보면 고칠 곳이 반드시 나온다. 누군가가 그랬다. 완성된 글은 없다고. 인쇄가 되어 나온 뒤에도 퇴고할 곳은 보인다.
제목은 퇴고까지 하고 나서 정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글 가운데서 찾아내거나 글 속에 있는 어떤 문장과 비슷한 문장을 만든다. 제목 정하기가 너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럴때는 제목 없이 그냥 묵혀둔다. 기한이 정해진 청탁 원고일 때는 너무 답답해서 방안을 뱅뱅 돌아다닌다.
가끔 가다 마음이 멈추는 수필을 읽을 때가 있다. 해박한 지식을 겸손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전달해 풍성한 과수원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 놀라운 상상력의 섬세한 묘사로 온 몸의 감각을 집중 시키는 글,내면 깊은 데서 우러나온 지독한 고독을 은근하게 전염시키는 글, 순결한 인격과 맑은 품격이 느껴져 마음이 숙연해 지는 글. 그런 글을 만날 때다. 아픔이나 슬픔을 푹 삭혀 드디어는 그 슬픔을 멀리서 바라보며 담담히 쓴 글을 읽을 때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은데...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기도 한다.
제목부터 시작하여 퇴고를 하기까지. 내 글이 반쯤 읽다가 던져지는 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멀다. <재미수필 17집>, <미국의 수필 폭풍> 2017 |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까지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우리는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단지 난 쓸뿐이다. 읽고 안 읽는건 그들의 몫이다.
이런 뱃짱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누군가 말했습니다. 글을 쓰는건 천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