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은 필수, 범죄는 NO

“이민자들이 정식 신분 취득해미국시민의 의무·권리 주장하고투표로 당당하게 목소리 냈으면 ”

2017.03.30

이현숙
재미수필가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골목을 흔들더니 ‘노.아이.씨.이. (No I.C.E.)’라는 외침이 들린다.
집 건너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지듯 나와 양쪽 인도를 꽉 채우며 데모를 하는데 그들의 손에는‘No I.C.E.’라고 쓰인 피켓이 들려 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아버지를 돌려줘’라고 외치자 학생들은 한목소리가 되어 따라 한다.
얼마 전 근처의 링컨 하이츠 학교에 12살 난 딸을 내려주던 곤살레스(48)를 이민국 단속반이 체포했다.
파티마는 아빠의 연행 과정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그녀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너무 무섭고 슬펐다.
등굣길에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음주운전과 경범기록이 있는데 오래전에 저지른 행위이고, 친구들과 교사들 앞에서 그의 딸이 겪었을 심적 고통과 두려움에 동정론이 일었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됐느냐는 여론이 며칠 뉴스를 장식했다.

이민세관단속국 (U.S.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의 약자인 I.C.E.가 히스패닉이 모여 사는 동네를 차갑게 얼리고 있다.
이민국 단속 때문에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나 경범죄 기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다.
어제 건축자재를 파는 상점인 홈디포에 갔다.
평상시 그 주차장 입구에는 많은 불체자가 일감을 얻기 위해 서성이다 차가 들어오면 달려들어 경쟁이 치열하다.
이제는 절반 정도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근처 DVD 영화 대여점의 권 사장은 울상이다.
작년 대비 상반기 매상이 8% 줄었단다.

옆의 대형 상점에 이민국 단속반이 버스를 세워 놓고 사람들의 신분증을 검사한 후부터 부쩍 손님이 줄었다는 것이다.
상점 월세나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걱정이란다.
건너편 집에 세를 들어 사는 루이사는 동네 유료 세탁장에서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는데 가게 앞에 낯선 차가 주차를 하면 일단 세탁 기계 뒤로 몸을 낮춘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인 루페는 지난 8년 동안 세금을 잘 냈는데 올해는 개인 소득세 자진 납부 마감일이 다가오는 게 두렵다고 한다.
아내가 불법체류자라 세금 보고하면 기록이 남게 되니 이민국에 연락이 갈까 봐서이다.
그의 조카는 간단한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는데 보험회사에서 경찰 보고서를 제출하라기에 경찰서로 갔다가 그 자리에서 이민국에 잡혔단다.
또 ICE 요원 4명이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 법원 청사의 복도에서 한 남성을 급습하고 체포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잔뜩 얼어 있는 주변의 히스패닉들은 American Dream을 품고 미국에 왔다.
풍요로운 기회의 땅, 자유가 살아 숨 쉬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꿈이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고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아서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이다.
최근 접하는 소식에 이제 그 꿈이 무너지나 걱정했는데 루페의 이야기를 듣고는 희망을 보았다.

그는 작년 연말에 미국 시민권을 신청해 놓고 예상문제집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다.
자신은 범죄 기록도 없고 그동안 착실히 세금을 내며 시민의 의무를 다했으니 미국시민권을 받아서 아내의 영주권을 신청하겠단다.
시민권 신청 러시는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한 도널드 트럼프를 내세운 대선을 앞두고 투표에 참여하려는 이민자들로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멕시코는 이중국적이 허용되기에 오히려 양국의 장점을 다 취득할 수가 있으니 손해 보는 일도 아니다.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국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며 영주권자로 10년 넘게 살았다.
그러다 미국에 다니러 오신 친정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는데 한국으로 모셔가기에는 절차가 복잡하고 어려웠다.
최선의 해결책이 내가 시민권을 받아 부모님의 영주권을 신청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쩔 수 없이 미루던 귀화를 결정했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부모님의 법적 위치가 달라지고 의료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 힘내라는 응원을 해 주었다.
루시아뿐 아니라 많은 불법 체류자들이 정식 신분을 취득해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미국에 살려면 시민권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의무와 권리를 주장하고 투표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왜라는 질문만 던지기에는 늦었다.
지금처럼 학생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이현숙
재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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