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간 핑크 리본>
여학생들이 모금함을 들고 있다. 멕시코의 산 펠리페는 시골동네라 신호등이 없고 Alto 멈춤 표시판이 있다. 그 주위에 보라색 셔츠를 입은 그들이 모여 있다. 차들이 멈출 때 마다 다가가 도움을 청한다.
우리의 차가 멈추니 두 명이 나풀나풀 날아온다. 무슨 일이죠. 오늘 이곳에서는 제8회 Cancer Walk 대회가 열렸단다. 유방암과 자궁암에 필요한 의료기기를 구입하려고 일 년에 한 번씩 걷기 대회를 한단다. 그러고 보니 보라색 셔츠에 핑크 리본이 나비되어 내려앉았다. 분홍과 보라가 만나 사랑을 이룬다. 수줍게 꽃잎을 하나씩 피며 여성으로 발돋움하는 여학생들이 입고 있어서인지 동네가 활기차다. 환하다.
유방암의 심벌마크인 핑크리본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91년 에블린 로디(에스티 로디 화장품 회사 사장)가 유방암에 걸린 후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가슴을 꽉 죄이는 코르셋 대신 실크 손수건 2장과 핑크 리본으로 앞가슴을 감싼 것의 상징이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건강, 그리고 가슴의 자유를 의미한다. 유방건강과 관련한 기본 상식 및 정보를 전달하므로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는 조기검진에 관심을 갖게 하는 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걷기대회는 9시에 시작해 벌써 마쳤다. 진즉 알았으면 나도 그들과 어울려 걸었을 것을. 아쉬운 마음으로 20불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 예쁜 셔츠는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방파제에 안내 천막이 있으니 그곳에서 사면된단다. 올해는 보라색이고 해마다 다른 색으로 바뀐다나. 하긴 그래야 사지. 같은 색이면 재활용을 하겠지. 참가자는 많았나요? 확실하지 않은데 백 명쯤 된 것 갔단다. 에이고 내가 백 한번째인데. 궁금한 것이 많아 자꾸 묻는데 뒤차가 참다못해 크렉션을 울려댄다.
이곳은 제대로 된 병원시설이 없다. 보건소도 없다. 의사가 한사람이 있는데 시체 검사관을 겸직한다. 치료도 힘든데 예방은 저기 보이는 바다 건너편의 세상일 것이다. 과연 주민 중에 몇 명이나 유방암과 자궁암 감사를 받아 보았을까. 몇 년이나 더 걷기대회를 해야 그 비싼 의료기기를 구입할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도 넉넉지가 않다. 관광객들에 의존해 사는 마을이다. 외지인들의 별장지역이라 미국의 불경기가 그곳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은행이 3개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하나로 줄었다. 상점들도 낮에는 거의 전기 불을 켜지 않는다. 햇볕이 들지 않는 안쪽은 깜깜하다.
자궁암 검사를 할 때가 되었다고 산부인과에서 보낸 엽서를 받은 지가 언제더라. 보험회사에서 비용을 처리해 주는데도 가지 않았다. 2년은 건너 뛴 것 같다. 있는 시설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나의 무신경을 반성한다. 주어진 여건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 엘에이 집으로 돌아가면 제일먼저 병원에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아야겠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열망하는 이곳의 여성들에게 미안하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데 방파제의 가운데 길에 천막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저곳에 걸어 다니는 보라색에게로만 눈길이 간다. 남편에게 구경을 하자고 했다. 핑크 리본이 새겨진 셔츠를 사야한다고. 그 옷을 입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달래고 싶다.
유리 상점에서 견적을 보러 오후 1시에 오기로 약속이 되어서 시간적 여유가 없단다. 하긴 놀러온 건 아니다 시누이의 집이 이곳에 있는데 벌써 세 번째 도둑이 들었다. 두 번째로 집을 털리고 나서야 알람을 설치했다. 이번에는 이층의 발코니에 있는 대형 유리를 깨고 쇠창살을 뜯었는데 알람 경보기가 힘차게 우는 바람에 집 안까지 침범하지는 못했다.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온통 신경은 방파제 쪽으로 쏠린다.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는데 남편은 오후에 다시 데려온다며 달랜다. 집에 돌아와 눈이 빠지게 그들을 기다렸다. 1시에 온다는 사람이 4시쯤이나 되서 왔고, 용접하는 사람은 월요일에 온단다. 이렇게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나. 돈 벌기 싫은가보지. 불평이 밀려나온다.
남편은 궁시렁대는 소리가 듣기 싫은지 쇠사슬과 자물통을 구해서 구부러지고 휘어진 쇠창살을 얼기설기 엮는다. 임시로 문을 닫고 방파제로 갔다. 오후 5시가 넘으니 어둠이 파도를 타고 수평선을 침범하며 밀려온다. 모래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인지 천막들이 파장을 해 자리가 훵하다. 안내 천막은 이미 걷어버렸다. 내 티셔츠는 어디로. 눈앞에 오전에 본 핑크 리본이 새겨진 보라색 셔츠가 아른거린다. 남편에게 원망의 눈 흘김을 쏘아 보낸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중간에 설치된 무대도 썰렁하다. 낮에는 라이브 밴드가 신나게 연주를 했었는데 그들도 떠나고 확성기를 통해 음악이 나온다. 크리스드버그의 Lady In Red가 나온다. 여성의 날이라 그리 선곡을 했나보지.
차에 오르는데 남편이 나를 부른다. 들어봐! 섹~시 레이~디. 낯익은 목소리다. 귀를 의심한다. 어머머 ! 멕시코 촌구석에서 강남을 만나다니.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밤바다를 들썩이며 말 춤을 추게 만든다. 우울하던 마음은 말 타고 모래사장으로 달려가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가슴을 흔들며 어설프게 말 춤도 춘다. 난 섹시 레이디.
이현숙 선생님 말춤을 다 추시고
본 듯 눈에 아른 거리네요.
언젠가 한 번 춤추는 모습 보고 싶네요.
전화 주셨는데 월례회 못가서 죄송했어요.
집에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