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는 등대가 있는가
신문 1면이 한인 여성에 대한 기사로 가득 채워졌다. 미아 패리시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애리조나의 최대신문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발행인 겸 사장이다. 요즈음 애리조나의 주민들은 그녀가 쓴 칼럼 때문에 잊어버린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대선후보들의 백가쟁명이 최고조에 달한 지난 10월 27일. 이 ‘애리조나 리퍼블릭’은 힐러리에 대한 지지를 공식 표명했다. 보수적이고 공화당 성향이 강한 애리조나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창간 12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공화당에 대한 배반이었다. 뜻밖의 발표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신문사를 폭파하겠다는 협박은 물론 기자들을 살해하겠다는 위협까지 했다. 신문사 직원들이 살벌한 기운에 시달릴 때 미아 패리시는 사장으로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다.
그녀는 기독교 탄압이 심하던 시절 투옥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종교를 지킨 외할아버지를 언급했다.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자신은 어디에 인간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안다고 했다. 어떠한 이유라도 폭력과 투쟁은 인간이 걸어갈 길이 아니며 자유롭고 공정하고 거침없는 의견 교환을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와,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멜팅팟으로 상징되는 미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의 근간이라며 설득했다.
난폭한 민중의 위협이 그녀의 칼럼으로 인하여 고개를 숙이고 ‘애리조나 리퍼블릭’ 신문사는 평정을 되찾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격랑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그녀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할아버지의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토록 단단한 생각의 뿌리를 심어주었을까.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녀의 삶을 비추는 등대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등대는 경치 좋고 안전한 곳에는 없다. 풍랑이 거친 해변의 방파제 위에, 시야가 협소하거나 위험한 해안선이나 험한 여울목에 있다. 외딴섬에서도 외로이 서서 암초가 있는 곳은 비켜갈 수 있도록 안내 해준다. 그것은 밝은 날에는 침묵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휘청거릴 때에야 비로소 생명의 빛으로 드러난다.
나에게도 등대 같은 사람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일했던 장애아 재활원에서 만난 송 선생님이다. 어릴 때에 앓은 소아마비로 인하여 한 쪽 다리를 몹시 절었던 그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자신의 모든 것을 지체부자유 고아들에게 쏟았다. 미국의 지인들과 비영리단체에 영문 편지를 보내고 그들이 보내어 온 선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 활짝 웃는 아이들의 사진을 미국으로 보냈다. 덕분에 해마다 후원처는 늘어나고 재활원은 한층 깨끗해지고 풍성해졌다.
그곳에 부임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송 선생님은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가르치는 내 교실에 불쑥 들어와 10분만 달라고 했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과연 이 공부가 어떻게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켜줄지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여러 장의 사진을 펼쳐 보였다. 아이들은 이미 익숙한 듯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 청각을 잃은 베토벤, 소아마비 바이얼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 소아마비 루즈벨트 대통령, 시각장애 시인 호메로스 등등... 이었다. 흑백 사진 속의 얼굴에 자신을 얹은 아이들의 상상은 금방 교실을 환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와 장애를 딛고 일어선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가 감히 이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비록 한 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내 삶의 한 귀퉁이에 애련하게 고여 있다.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가끔은 보고 싶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어느덧 그들도 쉰이 다 되어간다. 희끗희끗 머리가 희어지기 시작하는 마음에 아직도 흑백 사진 속의 얼굴들이 남아있을까. 그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자기들처럼 다리가 불편하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까. 분명히 송 선생님은 그들의 마음에 등대로 살아있을 것이다. 때로 삶의 수렁에 빠져서 혼란스러울 때에 등대 하나 우뚝 서 있어서 위로와 빛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신문을 덮으며 미아 패리시의 할아버지처럼, 아이들의 마음에 있을 송 선생님처럼 나도 누군가의 등대로 산 적이 있는지 돌아본다. <그린에세이 2017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