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남편을 출근시키고 설겆이를 했지요.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던 물이 졸졸 소리를 줄이더니 드디어 뚝 끊어졌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가뭄 때문에 절수를 강요하는 수도국이 잠시 물을 끊었나 싶어 일단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소파에 앉는데 순간 머리를 스치는 수상한 생각. ‘내가 수도세를 언제 내었지?’ 그러고 보니 수도세 보낸 기억이 까마득합니다. 이미 수돗물이 끊긴 전과가 있는지라 얼른 책상 위에 쌓여있는 메일들을 뒤졌습니다. 어제까지 수도세를 납부하지 않으면 물을 끊겠다는 협박장이 숨어 있네요. 바쁘게 다니느라 메일이 뒹굴고 있는 걸 모른 척 한 것이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수도국에 뛰어갔습니다.
 
 수도국 사무실은 조용했습니다. 허기야 요즘 같이 온라인 뱅킹에다 자동이체도 쉬운 시대에 수돗물이  끊겼다고 달려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고지서를 백에서 꺼내며 들어서니 작은 사무실에 건장한 남자의 넓은 등판이 접수처 창구를 막고 섰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들여다보는 그의 손끝에 시선이 갔습니다. 아, 돼지 저금통에서 잔뜩 쏟아져 나온 듯한 동전 한 무더기가 창구 앞 좁은 턱에 불안하게 쌓였습니다. 남자가 몇 개의 동전을 골라 창구 구멍으로 넣어주면 여직원은 남자의 동전을 받아 종이로 쌉니다. 동전을 세어본 여자가 "20센트요" 하면 남자가 동전 무더기 속에서 10센트 동전 두 개를 골라 창구 안으로 넣어 줍니다. 여자는 10센트 열 개를 한 다발로 묶어 1불을 만들어 두고는 다시 주문을 합니다. "4센트 더요" 남자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또 동전을 뒤집니다. 너 댓 살은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는 그의 곁에 서서 빨간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있습니다.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더벅머리 청년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하염없이 하품을 합니다.

 

   30여 년 전 어느 토요일 아침. 남편과 함께 딸아이를 안고 그로서리 마켓에 갔습니다. 계산대 위에 올려 진 고기와 야채, 아기 분유와 기저귀들이 일주일 살아갈 예산 50불을 초과해 버렸습니다. 지갑 속에 있는 돈은 달랑 50불인데... 이미 계산을 끝내고 카트에 담긴 물건 몇 개를 도로 꺼내야 했습니다. 67 달러, 58달러. 다브 비누 냄새가 상큼한 금발의 아가씨는 우리가 물건을 하나씩 덜어낼 때 마다 계산기 숫자판에서 내려가는 가격을 불러주었습니다. 아기 분유가 나오면 도로 카트에 집어넣고 또 뒤지기를 여러 번. 48달러. 그녀는 우리를 보고 생긋 웃어주었습니다. 뒤에서 길게 늘어선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뒤돌아보니 말없이 기다려주던 그들도 미소를 보내주었습니다.

 

  영수증을 받고 돌아서서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는 남자에게 나도 생긋 웃어줍니다. 아이의 손에는 사탕이 모두 사라진 빈 막대기만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뒤에 섰던 청년의 손이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냅니다.
 아룬다티 로이가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한 강연 원고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녀가 만약, 이런 소소한 미국 사람들의 일상을 본다면 어떤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 나라가 좋아집니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현대수필 그림이 있는 아포리즘 수필 선집>

 

 

IMG_611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