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 파티와 드레스 코드(Dress Code)
마우이 섬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후끈하는 더운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구리빛 피부의 건장한 안내원이 팻말을 들고 서서 우리를 맞으며 플루메리아 꽃목걸이 레이(Lei)를 걸어준다. 정말 하와이에 왔구나 싶다.
호텔은 해안도로로 다섯 시간을 가야한다고 한다. 바다가 얼마나 푸른지,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할 지 도무지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청록색이라 해야 하나. 비췻빛이라 해야 하나. 가슴이 떨린다. 운전사가 말했다. 여기는 공장이 없으므로 공기가 맑아서란다. 그러고 보니 하늘도 참으로 맑고 깨끗하다. 왼쪽으론 바다 오른 쪽으로는 사탕수수 밭이다. 작은 기찻길도 보인다. 기찻길 위로 장난감 같은 기차도 보인다. 사진 속에서 본 1800년대의 부웅 연기를 내며 달리는 기차다. 1900년 이 후로 사탕 수수밭이 점점 주택가로 바뀌고 있지만 기찻길과 기차는 관광용으로 남겨두었단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백인 여자 운전기사는 20년 전에 하와이에 왔다고 했다. 유나이티드 비행기 스튜디어스로 일하면서 여기에 올 때마다 너무 가슴이 설레어 먼 디트로이드에서 이사를 와버렸단다. 여기서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이렇게 관광객들에게 운전을 해주면서 산다고 한다. 외국 사람들은 열여덟 살이 넘으면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한다. 자녀가 어디로 가서 살던 간섭을 안 한다. 몇 년 전에 버뮤다 섬에 갔을 때에도 마사지 해주는 여자가 영국 여자라고 했다. 어떻게 여길 오게 되었느냐 물으니 여행을 왔다가 버뮤다의 풍광에 반하여 그냥 주저앉았다고 했다. 여기서 결혼을 하여 남편은 트럭 운전사로, 자기는 마사지를 배워서 살고 있다고. 부모님은 한 번씩 여행을 오신단다. 우리들 정서로는 이해가 안 되는 확실한 독립이다. 미국은 대학 성적조차 본인의 허락이 없으면 부모가 볼 수 없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주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얼마 전 동부의 어느 대학교에서 한인 여대생이 학교기숙사에서 자살을 했다. 아이가 평소에도 우울증으로 카운슬링 치료를 받았지만 부모는 통 몰랐다. 부모는 미리 알았더라면 조처를 취했을 텐데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아서 자살을 막지 못했다며 소송을 했다. 그러나 판사는 학교의 손을 들어주었다. 학생이 부모에게 알리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알려 줄 의무가 없었다는 이유였다.
리조트에 도착하니 바다를 끼고 앉은 호텔이 방갈로처럼 넓게 앉아있다. 리츠 칼튼 호텔이 이렇게 생긴 건 또 처음이다. 제일 높은 층이 6층이다.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이 마치 태풍이 난 것 같다. 야자수의 가느다란 허리가 앞뒤로 사정없이 출렁인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보면 바람은 따뜻하다. 낮은 언덕 위에 앉아있는 듯, 꽃과 풀이 바로 내 방 창 밑에 있다. 또 다른 운치다. 모든 세상살이를 다 잊어버리고 바다만 실컷 바라보고 가도 좋겠다.
저녁 만찬장에 갔다. 오늘도 역시 하와이식 가든파티다. 사람들은 야자수 그림이 요란한 알로하 셔츠와 플루메리아 꽃무늬가 화려한 드레스 무무(Muumuu)차림이 대부분이다. 아예 수영복 위에 무무를 걸쳐 입고 슬리퍼를 끄는 사람도 있다. 짚으로 지붕을 엮은 무대 위에서 요란하게 흥을 돋우던 드럼과 섹스폰, 기타와 키보드로 구성된 밴드팀이 잠시 뒤로 물러나자 원주민 남자들이 우쿠렐레를 들고 우루루 올라온다. 곧이어 레이를 목에 걸고 머리에도 얹은 원주민 여자들이 야자수 잎으로 만든 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손목과 허리를 요염하게 돌리며 전통춤 홀라를 춘다. 그들이 보여주는 손동작 하나하나가 언어라는 말을 듣고 유심히 보니 정말 섬세하고 유연한 움직임이 마치 수화를 하는 것 같다.
시간이 되어 공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무대 위로 회장 부부가 나타났다. 그도 알로하셔츠를 입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슬리퍼 대신 구두를 신고 긴바지를 입었다. 알로하셔츠는 여행지에서나 리조트에서 입는 복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결혼식이나 공식 파티에 참석을 할 때에도 갖춰 입는, 하와이에서는 격식을 차린 복장이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시상식에 알로하셔츠라... 회장의 차림새를 보니 옛날 너무 창피해서 숨어 다녔던 그 때가 생각난다. 30여 년 전이었다. 처음으로 하와이 컨퍼런스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온 지 몇 년 안 되었으니 하와이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조차도 낯 선 시기였다. 다행히 그때는 우리 외에도 H부부와 S부부가 있었다. 도착할 때 받은 주의사항이나 일정이 적힌 팜플렛은 깨알 같은 영어 글씨라 아예 볼 생각도 않고 호텔방에 던져두고 다녔다.
그 날도 오늘처럼 시상식과 더불어 첫 만찬이 있는 날이었다. 만찬 장소는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서 나가는, 바다를 끼고 펼쳐진 정원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찌감치 호텔방에 들어가서 정장으로 잘 차려 입었다. 남편은 감색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메고. 나는 은빛 큐빅이 목둘레를 돌며 반짝이고 뒷등이 거의 드러나는 롱드레스를 입었다. 옆방에서 나오는 H와 S부부도 우리 못지않게 멋을 내었다. 남자들은 모두 검은 정장에 번쩍이는 구두. 여자들은 화려한 드레스와 숄. 세 커플이 버스를 타고 보니 앉아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 그대로였다. 이상했지만 수다를 떠느라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꽃으로 장식한 아취가 있었다. 아취 앞에는 반바지 차림에 머리에 풀을 엮어 만든 모자를 쓴 원주민 남자와 긴 흑발에 꽃을 꽂고 가슴을 다 드러낸 무무 차림의 원주민 여자가 한가득 레이를 들고 서서 나눠주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니 여자에게는 남자가, 남자에게는 여자가 레이를 목에 걸어주며 볼에 뽀뽀를 했다. 여자들은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는데 남자들은 기분 좋은 웃음을 헤벌레 웃으며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커다란 돼지를 긴 장대에 꽂아서 연기를 피우며 바비큐 하는 주위에 모여 선 사람이나 칵테일을 들고 몰려서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모두 낮에 바닷가에서 놀던 그 차림이었다. 정장을 빼어 입은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구석지고 어두운 곳으로 몰려갔다. 바비큐 고기 냄새에 배가 고파 오르되브르를 들고 지나가는 웨이트레스를 “아줌마” 해가며 손짓으로 불렀다. 웨이트레스들은 우리 마음을 아는지 구석자리로 다가와서는 접시를 아예 통째로 주고 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자리를 옮겨 테이블로 가서 앉는 걸 보고 우리는 제일 구석자리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았다. 자유분방한 사람들 사이에 까만 정장을 입고 경직되어 앉아있는 모습을 서로 가리키며 사람들이 우리를 북한에서 온 줄로 알겠다. 하고는 막 웃었다. 남자들은 윗도리를 벗고 넥타이를 풀어 셔츠 단추를 두 개쯤 열어젖히며 최대한으로 불량한 복장으로 바꾸고, 여자들은 숄로 어깨를 감싸 드레스의 번쩍임을 숨기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립스틱도 닦아 내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몸을 낮추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음식을 서버하는 웨이터도,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아무도 이상한 차림에 눈길을 주어서 우리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인도 사람이 히잡을 쓰는 것이나, 일본 사람이 기모노를 입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 차원이었을까. 성숙한 그들의 태도가 고마웠다. 호텔로 돌아오는 것은 정해진 시간이 없이 각자 마음대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하기에 우리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안내서를 살펴보니 매일매일의 일정 가운데 복장에 대한 안내도 되어있었다. 그 날은 시상식이 있었지만 가든파티라 캐쥬얼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리는 첫 날의 실수가 창피해서 계속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온다. 철없던 젊은 날의 추억이다. 30년이 지난 오늘 또 하와이에 왔다. 이제는 미국생활에도 익숙해지고 그들의 파티문화에도 적응되어서 아무 거리낌이 없는데 그래도 바보같이 덤벙대던 그 때가 그립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