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지 / 압구정동에서
택시에서 내려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병원 앞에 내리면 길 건너 친구네 아파트가 보인다고 했는데 동서남북을 삥 둘러봐도 그럴싸한 건물이 없다.
이제는 부슬부슬 싸라기눈까지 흩뿌린다. 사람들은 눈을 피하느라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고 아슬아슬 자전거도 속력을 낸다. 핸드백은 어깨에서 자꾸만 흘러내리고 짐가방은 땅이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무겁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온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그 아파트를 아는 사람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중 나온다고 할 때 모른 척 그러라고 할 걸 괜히 택시 타면 된다고 큰소리 친 게 후회 된다. 다시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주섬주섬 핸드백을 뒤지는데 병원 문 앞에 앉아 수런거리고 있던 환자복 차림의 한 남자가 계단을 뛰어 내려온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휙 빼어서 쓰레기통에 던지며 어딜 찾느냐고 묻는다. 아파트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환자복 남자와 눈이 마주친 가게 주인도 고개를 젓는다. 계단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또 다른 환자가 슬며시 내려와 우리들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온다. 자기가 그 아파트를 잘 안다며 의기양양 하다. 내가 엉뚱한 병원 앞에서 내렸으니 다시 택시를 타야 한다고 한다.
말이 떨어지자 첫 번째 남자가 차도로 몸을 휙 돌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운다. 눈발이 조금 더 거세어졌다. 그의 벌거벗은 발이 슬리퍼 위에서 미끄러질 것만 같다. 푸른 바탕에 하얀 줄무늬의 부드러운 바짓가랑이가 바람에 마구 펄렁인다. 말려 올라간 소매 자락 안에 여윈 팔이 하얗다.
택시가 서자 한 사람은 고개를 택시 안으로 디밀고 기사 아저씨에게 건물 위치를 설명해 주고 또 다른 사람은 차 뒤에 가서 트렁크를 열라고 고함을 친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어느새 내 가방을 들고 트렁크 뒤에 가 섰다. 운전기사가 내려와 가방을 싣고 있는데 두 번째 환자가 운전기사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한 번 더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나보고는 기본요금만 내면 될 거라고 위로도 해준다.
차가 멀어질 때 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세 사람을 뒤돌아보고 있는 내게 운전기사가 물었다.
"아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요... 아, 아... 맞아요."
아무 사람도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죄송한 마음이다.
"아저씨예요. 아주아주 가까운 우리 아저씨들요. "
전혀 관계없는 운전기사한테라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으로 그 분들을 지칭해 드리는 것이 그나마 내가 고마움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만 같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텅 빈 병원 앞 계단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가게 앞 호떡 데우는 기계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