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 성민희
11월이다. 기교도 없이 뻣뻣이 선 막대기 두 개 11.
2 나 3, 5, 6 8, 9, 0 는 모두 곡선의 운율이 느껴져 부드럽고 4와 7은 비록 곡선은 없지만 완강한 꺾임이 있어서 멋지다. 그런데 1이란 숫자는 참 삭막하다. 사랑스런 곡선도 없고 날렵한 꺾임도 없다. 그저 밋밋한 작대기 하나다. 달력이 한 장씩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남은 두 장. 삭막한 작대기가 둘이나 서 있다. 두 작대기 11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공기를 휘젓고 나온다.
11월은 일 년의 잔열(殘熱)을 소중히 보듬는 시간이다. 마치 몸의 열기를 누런 놋그릇에 내어준, 밥공기에 남은 식은 밥 한 덩이 같은 달. 미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여린 사람이 꾸역꾸역 밀려 온, 반쯤은 비어있는 삼등 열차 마지막 칸 같은. 양철지붕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 같은 그런 달이다.
11월은 이별하기 좋은 달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빈 가슴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속된 유행가 가사에 흐느껴도 아득히 날아간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도 계절 탓이라고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낙엽이 스러진 보도 위를 정처 없이 헤매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바람도 있다. 거리의 나무는 몸에 지닌 것을 다 내어주고 강제로 무장해제 당한 포로처럼 서 있는데. 바바리코트 깊은 포켓에 담긴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그 손의 감촉쯤이야 바람에 날려간들 뭐가 애석하랴.
가을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고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계절. 하루로 치면 해가 막 진 어스름한 시간이다. 세월의 모든 물체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하루의 기억이 문을 닫고 가라앉는 시간.
11월은 이런 해 저문 녘의 잿빛 느낌이라서 좋다. 나는 이 쓸쓸함이 좋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2015년 11월 어느 날 롱비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