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정체성

 

  일 년이란 세월을 백수로 살아야하는 아들이 집에서 뒹굴다가, 삼촌 회사에도 나가다가 몸부림을 치더니 또 배낭을 짊어지고 나섰다. 동남아 쪽을 더 둘러보고 한국에도 가보고,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로 가서 스페니쉬를 배우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다. 남편은 이 기회에 회사로 불러다가 좀 써먹어야지 기대를 했지만 도통 아빠 회사에는 관심이 없다. 인생은 긴데. 세계 곳곳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며 집 떠나는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배웅했다.

 

  아들은 어느 날은 베트남에서, 또 어느 날은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나라가 바뀔 때마다 이메일을 보내왔다. 전화도 되지 않고 연락처도 없으니 허공 어느 곳에서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어떤 사람들이랑 어울리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그저 믿는 마음으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마치 우주를 떠돌다가 지구에 안착한 것 같아 휴우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한국에서 몇 달을 보내는가 했더니 예정에 없이 일찍 들어왔다. 친구들과 함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오바마 선거캠프에 들어가서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뉴멕시코로 날아가서 두 달 간의 선거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몸과 마음이 부쩍 큰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어느 나라가 더 좋은지 토론이 벌어졌다. 아들에게 물었다. 미국과 영국이 싸우면 어느 나라를 편들겠냐고. 당연히 미국이라고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또 물었다. 만약에 한국과 미국이 싸우면 어쩌겠냐고. 아들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싸우는 이슈에 따라서 결정을 하겠다고 한다.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것인지, 한국 사람인 동시에 미국사람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들은 지난 몇 달 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남아를 배낭여행하면서 유스호스텔을 묵었다. 자기와 같은 세계 각국의 배낭여행 청년들이 모여 각자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제일 먼저 묻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름보다 국적을 더 궁금해 한다. 당연히 아들은 어메리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모두들 고개를 갸웃하더란다. 너는 동양인이지 않느냐고.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대학까지 마쳤으니 당연히 미국사람이라고 아무런 느낌 없이 말했더니 너의 부모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었냐고 또 묻더란다. 원래 한국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미국 시민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너는 한국 사람이라고 못을 박아버리더란다. 아들은 한국말보다 영어가 훨씬 쉽고 한국문화보다 미국문화에 더욱 익숙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아들은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시선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갔다. 한국에서 또래의 사촌이랑 함께 지내면서 사촌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한국 아이들은 아들이 아무리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도 미국인 취급을 하더란다. 아들은 분명 자기와 똑같이 생긴 한국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문화와 생각의 차이를 발견했다. 외국인들은 아들을 한국 사람으로 인정하는데 오히려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라며 더 어려워했다. 정작 미국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정체성의 혼란을 부모의 나라 한국에서 느끼고는 한동안 우울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란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보며 자기는 정말 미국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오바마 선거 캠프에서 그의 할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을 태우고 다니며 오바마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과 같은 이민 1세대라는 것에 친밀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오바마는 자기와 같은 2세대인데. 이민 2세가 이 미국땅의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면 분명 자신은 미국사람이라는 확신이 왔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한 번도 미국에서 사는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과연 미국에 온 것이 잘 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남편 회사의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캐나다의 벤퍼 스프링스 호텔에서 며칠을 보낸 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였다. 네 쌍의 부부 여덟 명이 앉은 테이블에는 각 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했는데 그 날은 미조리주에서 왔다는 부부가 옆에 앉았다. 그 부부는 동양인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무척 반가운 한편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신기해 했다. 부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엘에이라고 했더니 태어난 나라가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로스앤젤레스라는 말에는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다. 코리아라는 내 말에 또 North? South? 했다. 당연히 사우스지요. 노스는 공산당이잖아요. 그래도 한국이 분단된 것은 알고 있었다. 미군 파병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베트남을 알고 있듯이. 음식이 나오자 “너희들 음식 괜찮니? 입에 맞니?” 미국 온지 30년이 넘었다고 누누이 설명 했는데도 여전히 걱정을 했다. 암만 우리가 미국화 되어 불편이 없다고 말해도 이 사람들 눈에는 도무지 미국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 사람일 뿐이다. 순간순간 우리를 어린아이 보살피듯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이들 걱정이 되었다. 우리의 2세들이 암만 능력이 있다고 한들 주류 사회에 들어가서 이 벽을 어떻게 뚫고 우뚝 설 수 있을까. 이들의 눈에는 외국인인데. 정말 특별한 전문성이 없으면 힘들겠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아들은 정체성을 찾았다며 마음을 다스렸지만 아들을 보는 내 마음은 편치 않다. 내 나라 내 땅에서 주인 노릇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줄 걸 왜 우리는 이곳에 뿌리를 내렸을까 하는 후회도 든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전문직을 가져라. 스페셜티가 있어야한다고 강조 했지만 . 그 때는 그저 막연히 한 말이었다. 막상 전문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 세계에서도 또 경쟁이 있을 것이니 어찌 감당하며 어찌 이 두터운 유리천정을 뚫고 올라갈까 싶다.

모든 이민자들의 마음속에 희망의 싹을 심어준 오바마의 존재가 새삼 고맙다.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미국인들의 성숙된 마음도 존경스럽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