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잘 모르겠다
아침부터 이런저런 일로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간단한 요기라도 할 량으로 멕시칸 페스트푸드 식당 Rubio’s에 갔다. 한산한 식당 안은 나처럼 점심시간을 놓친 사람들이신문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평화롭게 부리또와 타코를 먹고 있다.
금발머리에 핑크색 핀을 앙징맞게 꽂은 직원이 계산대 앞에 서서 나를 맞아준다. 그녀의 등 뒤 벽에 울긋불긋 붙어있는 Mahi Mahi 사진이 먹음직스럽다. 새로 개발된 메뉴인 모양이다. 피쉬타코를 먹어야지 하고 들어왔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그림 속의 것이 먹고 싶어졌다. Mahi Mahi로 주문을 하고 지갑을 꺼내는데 머릿속에서 피쉬타코는? 한다. 어떻게 할까, 잠시 주저하다가 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계산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여자가 힐끗 나를 올려다본다. 내가 마음을 바꾸었다며 피쉬타코를 달라고 했다. 순간 여자의 표정이 변했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큰소리로 ‘Oh My Gosh!’ 한다. 짜증을 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냥 아무거나 먹을 걸 후회가 잠시 스치는데, 거칠게 계산기 문을 여는 그녀의 손길 너머로 가슴에 달린 이름표가 보인다. ‘Manager Susan Smith’. 매니저다. 직원들에게 고객 상대 매너를 교육 시켜야 할 매니저가 이런 식이라면…. 갑자기 내가 동양여자라서 깔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휙 스친다. 더불어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 고객들이 무시를 당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신, 매니저예요? 그녀가 턱을 슬쩍 치켜들며 뚱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방금 뭐라고 했지요? 내 표정이 심상찮았는지 그녀의 눈빛이 금방 달라진다. 가게 주인들이 두려워하는, 혹시 내가 인종차별 운운하며 시비를 걸까봐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어떻게 가격을 정정하는지 몰라서...” 그녀가 말을 흐린다.
“아니, 금방 큰 소리로 한 말. Oh My Gosh?”
“그건 내가 계산기를 잘 다룰 줄 몰라서 나에게 한 말이었어요.”
“본인에게 한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귀에도 들렸어요.”
“오, 그게 아닌데...”
“매니저가 손님에게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예요? 오 마이 가쉬?”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눈을 살짝 내려 깔며 아임 쏘리를 하고는 휙 돌아서서 주방 쪽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나는 정식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다시 하라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두 다리를 모으고 똑바로 서서 내 눈을 쳐다보며 아임 쏘리를 했다. 아주 똑똑한 목소리로. 인종차별을 한 게 아니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오지만 그 말을 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처지의 인종인가?
아이들 키울 때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한 집에 모여 아이의 생일 파티를 하고 늦은 밤까지 왁자하게 놀고 있는데 이층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다닥 뛰어내려오며 큰일이 났다고 했다. 한 아이가 넘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찧은 것이었다. 피가 범벅이 된 이마를 붕대로 감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접수창구 너머로 흑인 여자가 앉아서 메니큐어를 손톱에 칠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소란에 전혀 동요도 하지 않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쉣”하며 칠하고 있던 메니큐어를 옆으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끙하고 일어나 느릿느릿 창구 앞으로 다가왔다. 뭐 이런 인간들이 나를 귀찮게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순간 친구가 왁하고 고함을 질렀다.
“너, 뭐야. 이런 판국에 쉣이라니. 아이 머리에 붕대 감긴 것 안 보여? 메니저 불러.”
친구의 고함소리에 나도 놀랐다. 직원이 너무 하긴 했지만 이 판국에 우리가 화를 내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갑자기 병원 안이 왁자지껄해졌다. 안에서 환자를 돌보던 의사와 간호사가 뛰쳐나왔다.
“메니져 불러. 메니저 어디 있어? 지금 이 여자 우리를 인종차별하고 있단 말이야.”
점잖은 중년 백인 남자가 나타났다. 어느새 아이는 침대 위에 누워서 치료를 받고 있고 메니저는 인종차별 받았다며 펄펄 뛰는 친구를 달래느라 허둥거렸다. 친구는 말했다. 저 간호사 당장 파면시키지 않으면 이 병원 고소하겠다고.
며칠 뒤 병원에서 그 간호사를 파면 시켰으니 제발 아무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왜 이리 생생하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남의 나라에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실감이 난다. 만일 여기가 한국이라면 우리는 이런 대우를 어떤 기분으로 대처했을까. 식당의 그 여자 참 성격이 안 좋네. 하거나 그냥 순간적으로 변덕을 부린 나를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병원 그 여직원은 한가한 밤 근무를 즐기는데 우리들의 출현이 좀 성가셨겠지 하고 참을 수도 있었을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늘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다. 소위 한국에서 말하는 ‘몹쓸 갑질’을 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녀가 도로 못난 동양 여자의 열등감 때문에 엉뚱하게 폭탄을 맞은, 도리어 역 인종차별을 당한 피해자가 아니었는지…. 이런, 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