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다, 마가렛 미첼.

 

그녀를 만나다, 마가렛 미첼.

 

 

미국 조지아 주 존스보로 Jonesboro'타라로 가는 길Road to Tara 박물관'이다. 마가렛 미첼이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쓴 곳이다. 들어서니 가장 먼저 그녀의 초상화가 보인다. 강렬한 눈빛과 단정한 자태가 작품 속의 두 여주인공을 합친 분위기이다.

 

나는 이 소설을 중학생 때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손에서 떼어내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스칼렛과 래트, 멜라니와 애슐 리가 표현하는 각기 다른 사랑을 전쟁과 연결해서 절묘하게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남부 특유의 전통에 반발하며 한 여성이 독립된 존재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절망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불굴의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는 메시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이 집을 덤프라고 불렀다지. 여러 가구가 살았던 아파트였기 때문일까.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니 비비안 리 못지않은 미모에 몽환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키가 150Cm정도라더니 집안의 가구들이 모두 작았다. 아기자기한 부엌살림살이에 미첼이 요리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침대 위에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입으려는 듯 드레스가 놓여 있다.

 

글쓰기 다음으로 즐겼다는 재봉틀이 보인다. 그 주위에 자잘한 소품들이 그녀의 손길을 거쳐 갔다며 콧대를 세우고 있다. 캐비닛 안에는 어머니에게 가보로 물려받은 도자기들이 진열 되어 있는데 소설 속 우아한 부인 엘렌 오하라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타자기가 보인다.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한다. 의자에 앉아 세기의 명작을 탄생시킨 타자기를 내려다본다. 만지고 싶지만,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아내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다가 나중에 타자기를 내밀었다는 남편. 따분한 과학 서적을 빼고는 더 읽을 책이 없으니 당신이 책을 쓰는 수밖에 없겠다며 등을 떠밀었다.

 

미첼은 어릴 적부터 메모하는 버릇이 있었단다. 평소에 문학뿐 아니라 당시 인물의 전기 등 많은 양의 책을 읽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들은 옛 남부의 역사와 남북전쟁을 기초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대와 인물들, 옷에서부터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남부 사람들의 전통성이 배경을 이룬다. 10년 동안의 조사와 집필 끝에 1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소설이 완성되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글 쓰는 것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방문객이 있을 때면 항상 큰 수건으로 타자기를 가렸단다.

 

그녀는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고 말했다. 맥밀런 출판사 편집장인 해럴드에게 한 번만 읽어 달라며 세 번의 전보를 연이어 보낸 집념의 여인이다. 마차를 끌고 남군과 북군 사이를 헤지며 타라로 돌아가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 황량하게 변해버린 타라에서 "신을 증인으로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사기 치고, 살인해서라도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는 스칼렛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출판을 하며 인세에 관해 쓴 계약서도 보관되어 있다. 진열된 세계 각국의 번역본 중에 한국어로 된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나라에 따라 표지의 디자인과 스칼렛의 모습이 다르다. 이 책은 1937년 미국 도서 판매 협회상에 이어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전에 썼던 미발표 작이 여럿 있었으나 모두 소각되어 다른 작품이 없어 아쉬웠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1939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빅터 플레밍이 감독하고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스칼렛 오하라는 예쁜 편은 아니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에 비교해 영화 속의 비비안 리는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아름다웠다. 세계에서 최초의 영화 시사회를 애틀랜타의 "Lowe's Grand Theater에서 했는데 당시의 사진들 속에 미첼과 출연진들이 다정한 자세를 취했다.

 

야만스러울 만큼 붉은 땅이라고 했던 타라의 집 모형이 있다. 제작 기간이 3년이나 걸릴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각국의 영화 포스터가 진열되어 있고, 출연진들의 사진과 인형들이 실제 크기부터 미니어처까지 박물관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개미허리를 돋보이게 할 때 입었던 판탈렛과 커튼을 뜯어 만든 녹색 벨벳 드레스를 비롯해 많은 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드레스 사이를 이리저리 돌다 보니 마치 스칼렛과 함께 왈츠를 추는 듯했다. 버틀러와 춤을 출 때, 또 애슐리가 멜라니에게 보낸 편지를 몰래 읽고 나서 혼자 흥얼거렸던 <이 참혹한 전쟁이 끝날 때> 라는 음악이 들린다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발로 장단을 맞출 것이다.

 

인종차별을 한다며 미첼을 구설에 오르게 한 흑인 노예 Mammy에 관한 스토리가 한 코너를 장식했다. 오래전 읽은 번역본에서는 할멈으로 되어 있는데 원본의 Mammy로 부르는 게 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영화에서 유모 역을 한 헤이티 맥데니엘은 주인공들에게 뒤지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 주목을 받았다. 부푼 볼에 뚱한 표정을 한 인형과 사진들이 재미있다. 비비안 리의 허리를 조이며 숙녀는 개미처럼 먹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던 장면이 생각난다. 마가렛 미첼이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맙시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꿋꿋이 우리의 길을 갑시다.” 라며 헤이티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흑인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 때 위로로 보낸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녀는 단 한편의 소설로 세계를 열광시켰다.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모든 것은 내일 타라에서 생각하기로 하자. 그를 되찾는 방법도 내일 생각하기로 하자.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뜰 테니까. 긴 여운을 남겼기에 사람들은 속편을 기다렸다. 두 사람이 재결합은 하는지, 한다면 스칼렛이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다시 찾을지 궁금하기에.

 

속편은 없다고 단언했다. 전화가 너무 자주 울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다. 보내져 오는 책에 서명해서 돌려보내느라, 방문자를 맞이하고 초대에 응하며 지쳤단다. 아니면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샘이 고갈되었는지도 모른다.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미첼은 부를 나눌 줄 아는 큰 사람이다. 2차 대전에 적십자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헌금으로 군함 두 척을 제조했다. 진수식 때 찍은 사진을 보니 남자들 사이에 파묻힌 작은 여인, 그러나 활짝 편 어깨가 그들을 당당히 누르고 있다. 무명으로 흑인 의대생들에게 장학금도 지원했단다. 초상화에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보면 적십자 핀이 꽂혀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 없는 메시지를 전한다. 방문객이면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을 터이니.

 

그녀는 1949년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Peach Street은 뗄 수 없는 인연으로 그 길에 결혼 전까지 살던 집터와 시사회를 했던 영화관이 있다. 남편과 영화를 보기 위해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 곳도 그 길이다. 근처의 오클랜드 묘지에 남편과 함께 잠들어 있다. 미국식이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데 본인의 이름으로도 문패를 달았던 그녀였기에 비석에 어떻게 쓰였을지 궁금하다. 내 삶을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라며 전통에 반발하는 당당한 여성상을 보여 준 미첼이다.

 

아쉬움을 남기며 박물관을 나온다. 눈에 담은 것이 많아서 잠시 그 앞에 놓인 작은 벤치에 앉았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의 열기를 식히는데 바로 옆에 역사적으로 보존된 오래된 기차역이 보인다. 애틀랜타를 연결하는 철도 공급선이 끊어져 북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당시의 역에 대한 상황 설명이 소설과 맞물린다. 기차를 타면 타라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에 가면 그녀의 표현대로 붉은 들과 싹트는 푸른 목화 그리고 상쾌한 황혼을 만날 수 있을 터인데. 그곳에 가고 싶다. 단 한편의 소설로 세계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전해준 여인, 마가렛 미첼. 그녀를 만나러 먼 길 온 보람을 느낀다.

 

 

등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그걸로 책을 써보라고. 당신이라면 명작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뭘 쓰라는 거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거지 뭐. 글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어.”

 

마가렛 미첼과 그녀의 남편이 타자기를 앞에 놓고 주고받았다는 대화다.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거, 그게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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