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미주통신]  공항 이별의 그날, 35년 전

 

 

“이민 가던 날 혼자서 아기 업고 환송해주는 사람도 없었던 공항 코미디 프로 같은 35년 전 그날”

 

2016.12.09

성민희
재미 수필문학가협회장



오랜 세월동안 묵은 친구 여덟 명이 뭉쳤다.  아들의 고등학교 시절 학부모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엄마들이다. 아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끈끈하다. 

오늘은 딸을 결혼시킨 앤지 엄마가 저녁을 사기로 한 날이라 세리토스에 있는 한정식 집에 모였다. 
세리토스는 미국에 뿌리내린 지 4년 만에 내 집을 사서 이사한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교통이 편리할 뿐 더러 교육환경과 공공도서관이 좋아 한인들이 선호하는 도시였다. 그러나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귀했다. 조그만 한국마켓을 중심으로 한국식당이 서너 개, 한국 옷가게와 구둣가게, 약국이 각각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오랜만에 와 보니 여간 번화해진 것이 아니다.
커다란 쇼핑몰이 모두 한국식당, 커피샵, 옷가게, 선물가게, 빵집, 학원으로 채워졌다. 식당도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으로 다양하다.  한국의 큰 체인식당 간판도 여러 개다.  모든 가게에 한국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어서 엘에이의 코리아타운인가 착각이 될 정도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왔을까.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를 생각하니 그때의 까닭 없이 쓸쓸하던 느낌이 가슴 밑바닥에서 서서히 차오른다.  달도 별도 낯선 하늘. 하루 종일 공기만 빼 문 채 고요하던 전화. 진공 속에 혼자 떨어진 것 같았던 적막이 물 잔을 서서히 채운다.  물을 컥 들이켰다. 
“자기는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됐어?” 불쑥 앞자리의 에릭 엄마한테 물었다.
뜬금없는 내 질문에 우리는 삼십 년 전 어느 순간으로 후루룩 날아간다.
신붓감 찾으러 한국에 들어온 재미교포 청년에게 꼬였다는, 억울한 표정의 대답에 우리는 깔깔 웃는다.  80년대, 그때는 재미교포와 결혼한 여자는 신데렐라였다. 미국 오는 날 공항에는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몰려와서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는, 공항의 이별이란 말이 또 한 번 우리를 웃음밭으로 몰고 간다. 

앤지 엄마도 거든다. 
“내가 올 때는 말이다. 
친척들이 큰 식당을 빌려서는 ‘이아무개 미국 이민 환송회’라는 플래카드까지 걸어놓고 파티를 해 줬어. 거기서 울고불고…” 다른 테이블 손님이 고개를 젓는 것도 아랑곳없이 우리들은 마구 웃는다. 
“나는 남편이 지사 발령으로 미국 들어간 몇 달 후에 들어왔걸랑. 시골 친척들까지 올라와서 손을 흔들어주는데 어찌나 슬픈지, 마치 내가 한국 땅에 다시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더라니까. 우리 엄마는 미국에는 김치가 없다고 내쇼날 프라스틱 통에 세 통이나 담아서 짐 속에 넣어 주잖아. 엘에이 공항에 내렸는데 그게 압력을 못 이겨서 터져버린 거라. 그때만 해도 미국 인심이 좋았나봐. 그냥 통과시켜 주더라. 남편은 마누라 온 것만도 감지덕지라 벌건 김칫국물이 줄줄 새는 가방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끌고 가더라. 지나가는 백인들은 코를 막고 도망을 가고. 흐흐흐”  
그때는 이민 간다고 하면 영원한 이별인 듯 친구와 친척들이 환송을 나와 눈물바다를 이뤘다.
비자도 필요 없이 이웃 도시 다녀오듯 안녕 가벼운 인사만 하고 들락거리는 지금과 비교해 보면 세월은 무심히 혼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강물이 돌멩이를 만져주고 가듯 세월의 물살은 쓰다듬지 않는 것이 없나보다. 아이들을 어른으로 키우고 한적한 도시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보이지 않는 삶의 풍속도도 이렇게 바꿨다. 

이제는 내 차례다.  돌아보니 스산하던 1981년 3월의 김포 공항 터미널이 떠오른다.
“그때 딸이 5개월이었어.” 나는 비자 날짜가 만료돼서 ROTC 장교였던 남편의 제대 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탓에 환송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떠나와야 했다. 남편은 출국 수속을 해 주고는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봤다.  비행기를 타려면 아직도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데, 자기는 대학원 수업 시간이 다 됐다며 가야한단다.  혼자 기다릴 외로움보다 그가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누런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있었거던.”

 모두가 깜짝, 눈을 껌벅이더니 마구 손뼉을 친다. 웃음보가 한꺼번에 다 터져버렸다. 
“아이고오~~ 너가 아기를 업고? 호호호호. 그때 사진 한 장 안 찍어뒀어?”

“화장도 안한 젊은 여자 혼자서 아기를 업고, 가방을 질질 끌고 간다고 생각 좀 해 봐라. 미국까지 가는데 손 흔들어 주는 사람도 하나 없고.”

모두들 배를 잡고 온몸을 흔들어댄다. 식탁 위 그릇들도 함께 개글개글이다. 
남편이 야속하고, 한편 콧날도 찡해졌던 그때의 내 모습이 친구들 앞에 펼쳐지니 코미디 프로의 한 장면이 되어버린다. 

오늘의 공항 이별 이야기는 비싼 저녁을 산 앤지 엄마까지 제치고 단연 내가 일등 먹었다.

 

성민희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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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 아침에 4/23>
 
친구 일곱 명이 뭉쳤다. 아들의 고교 시절 학부모회에서 활동하던 엄마들이다. 오늘은 앤지 엄마의 초대로 세리토스에 있는 한정식집에 모였다. 세리토스는 미국에 뿌리내린 지 4년 만에 내 집을 사서 이사한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때는 작은 한인마켓을 중심으로 한식당이 두 곳, 옷가게와 약국이 각각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대형 쇼핑몰이 모두 한인 가게로 채워졌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을까. 미국에 첫발을 디딜 때를 생각하니 그때의 까닭 없이 쓸쓸하던 느낌이 가슴 밑바닥에서 서서히 차오른다. 달도 별도 낯선 하늘. 하루 종일 공기만 빼 문 채 조용하던 전화. 진공 속에 혼자 떨어진 것 같았던 적막이 물 잔을 서서히 채운다. 물을 컥 들이켰다. 

"자기는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됐어?" 불쑥 앞자리의 에릭 엄마한테 물었다. 뜬금없는 내 질문에 우리는 어느 순간으로 후루룩 날아간다. 신붓감 찾으러 온 재미교포 청년에게 꼬였다는 억울한 표정이다. 미국 오는 날 친구와 친척들이 공항에 몰려와서 얼싸안고 울었다는, 공항의 이별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듣는다. 수잔 엄마도 거든다. "그때는 말이다. 큰 식당에 '미국 이민 환송회'라는 플래카드까지 걸어놓고 송별회를 해 줬어. 울고불고…." "나는 남편이 지사 발령으로 들어간 몇 달 후에 쫓아왔걸랑. 시골 친척들까지 올라왔는데 어찌나 흥감한 지, 마치 내가 살아서는 다시 한국 땅에 돌아오면 안 될 것 같더라니까. 흐흐흐." 

그 시절은 이민을 간다고 하면 영원한 이별인 듯 사람들이 공항에서 눈물바다를 이뤘다. 비자도 없이 이웃 도시처럼 들락거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세월은 무심히 혼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구나 싶다. 강물이 돌멩이를 만져주고 가듯 세월의 물살은 쓰다듬지 않는 것이 없나 보다. 아이를 어른으로 키우고 한적한 도시로 사람을 끌어모으고 보이지 않는 삶의 풍속도도 이렇게 바꿨다. 

이제는 내 차례다. 스산하던 1981년 3월의 김포공항 터미널이 떠오른다. "그때 딸이 5개월이었어." 나는 비자 기한이 만료되어서 ROTC 장교였던 남편의 제대 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탓에 환송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남편은 출국수속을 해 주고는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봤다. 탑승이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았지만 대학원 수업이 있다며 조바심이었다. 혼자서 기다릴 외로움보다 그의 안절부절이 더 부담스러웠다. "나는 누런 포대기로 딸을 업고 있었거든." 모두가 깜짝, 눈을 껌벅이더니 마구 손뼉을 친다. "아이고, 네가 아기를 업고? 호호호호." "화장도 안 한 젊은 여자 혼자서 아기를 업고, 이민가방을 질질 끌고 간다고 생각 좀 해 봐라." 

남편이 야속하고, 한편 콧날도 찡해졌던 그 때의 내 모습이 35년이 지난 후 펼쳐지니 코미디 프로의 한 장면이 되어버린다. 내 안에서 어룽대던 외로움도 완강하던 원망도 고마운 세월이 다 쓸고 가 주었다. 

그 날의 공항 이별 이야기는 비싼 저녁을 산 앤지 엄마를 제치고 내가 일등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