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거울/ 성민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숱한 사람들 중에서 무슨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 정을 주고받는 사람이 되었을까 싶어서다. 더구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는 보석처럼 소중하다. 주책을 부리든, 성질을 부리든 그저 이쁘게만 보인다. 서로의 마음 밭에 뿌려진 정이 세월만큼 숙성되고 발효되어 향기조차 뭉근해진 탓일까.
뒷마당 푸성귀가 싱싱하다며 안나 엄마가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한다. 꽁치 통조림을 풀은 냄비에 호박 숭숭 썰어 넣은 걸쭉한 쌈된장과 상추와 풋고추, 감자국이 전부인 식탁에 네 쌍의 부부가 둘러앉았다. 겨우 이것 차려놓고 사람을 불렀냐며 앤드류 엄마가 눈을 흘긴다. 고맙다 하고 먹을 일이지 웬 잔소리냐며 안나 엄마가 쥐어박는 소리를 한다. 에헤이 맛만 좋구먼. 나래 엄마도 한마디 거든다. 아웅다웅 요란했던 긴 세월이 상 위에서 맛있게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만난 지도 벌써 30년째다. 팔랑거리는 유치원생 큰아이 손을 잡고 갓 낳은 둘째를 유모차에 앉힌 채, 미국이란 낯 선 곳에 짐을 갓 푼 이민초년병들이었다. 딸만 둘인 나래네, 딸 둘에 아들 하나인 안나네, 아들 하나인 앤드류네, 아들 하나 딸 하나인 우리 집. 인연이 깊어지려고 그랬을까. 첫째끼리 모두 동갑이고, 둘째끼리도 서로 동갑이다.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어른들끼리도 아이들끼리도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일요일 마다 한 집에 모이면 그야말로 난리였다. 테이블을 흔들어 꽃병을 깨고, 어디서 찾아내었는지 난데없는 망치를 들고 와 발등을 찧고. 소다병을 떨어뜨려 얼굴이 찢어지고, 서로 물고 물리고. 하여튼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전혀 무리 없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여자들이 밥을 먹으려면 남자들은 둘째를 업고 바깥으로 나갔다. 창밖의 아기 업은 남편들을 보면서 킥킥거렸다. 밤이 늦어 아이들이 잠에 취해 쓰러져도 헤어지기 싫었다.
그때는 사람이 그리웠다. 한국에 두고 온 것은 직장과 이력뿐이 아니었다. 방마다 전화기가 있었지만 벨을 울려주는 친구는 없었다.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다는 건 참으로 쓸쓸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뽑혀져 온 뿌리가 이 땅의 흙을 움켜쥐고 온전히 몸을 세우지 못한 어중간한 상태가 답답하고 지루했다. 우리는 서로를 가엾어 했다.
첫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 처음으로 아침 식탁을 냄새 나지 않는 빵으로 바꾸었다. 한국말만 쓰던 아이에게 몇 마디 영어도 가르쳤다. 예스, 노, 오줌 마려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만큼 우리들의 뿌리도 조금씩 깊어졌나 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로 옮기면서 몸과 맘이 자라듯이 우리의 집도 아파트에서 하우스로, 좀 더 큰 주택으로 옮겨졌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되고 우리들은 풍성하게 나풀대던 머리가 숭숭 벗겨지고 허얘졌다. 세월이 가며 우리의 몸은 윤기를 잃어 가는데 만나서 떠올리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푸르고 싱싱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만남은 고향인 듯 정답다.
식사가 끝나 커피가 나오고 쇼트트랙 선수 안현수 이야기도 나왔다. 올림픽 금메달 선수를 러시아에게 내어준 빙상연맹이 자기들 잘못을 어떤 식으로 무마 할까, 안현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토론으로 모두 심각한데 갑자기 안나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안현수는 이제 러시아의 영웅이야. 그의 여자 친구도 러시아에 가면 국빈반점이닷.”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 배를 잡고 뒹굴고 말았다. 국빈 대접! 국빈 대접! 아차 싶은 안나 엄마가 아무리 국빈반점이 아니라고 외쳐도 소용이 없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옛날 동네 짜장면집 이름이 별안간 안나 엄마의 별명이 되어버렸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다. 친구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이라고.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친구들 생각에 자주 눈이 젖는다. 몇 명의 친구들은 이미 떠나고 그나마 남아있는 친구들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시니어센터에 가서 마주보고 앉아도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는 친구는 “나 누군지 알아?” 묻은 어머니의 말에 빙긋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인다고 한다. 함께 엮었던 세월이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는데 친구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졌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무척 절망케 만드는 모양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당신도 그렇게 변해갈 것만 같아, 어머니는 친구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머리를 빗겨주면서 눈물을 흘리신다.
우리도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얼마를 더 함께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서로의 거울이 되어 마지막 그 날까지 함께 갈 것이다. 우리에게도 필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정적의 시간이 올 것이고 끝까지 남은 한 사람은 내 어머니처럼 희미해진 기억을 붙잡고 외로워하겠지.
상추가 많이 남았다며 안나 엄마가 비닐 봉투에 담아 나눠준다. 국빈반점, 고마워. 우리는 유쾌한 웃음소리로 차 시동을 건다. 오늘은 참 달이 밝기도 하다. < 사람이 고향이다 2016년> < 문학세계 2016> <애틀란타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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