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강경 가는 길

박유니스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20/05/15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20/05/14 18:30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를 남쪽으로 달리다 강경 쪽으로 가는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곳 읍내에서 양순이의 외삼촌이 제법 큰 정미소를 운영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국을 방문했던 어느 해 주말, 남편과 차를 몰아 이제는 초로의 부인이 되었을 양순이를 찾아 나섰다. 가을걷이가 끝난 국도 양편의 논들은 누르스름하게 누워 파릇하던 전성기를 반추하고 있었다.

광복 이듬해에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난 계동 집에서 장충단 공원 부근의 쌍림동으로 이사했다. 계동 집을 지인에게 맡기고 급히 쌍림동의 적산 가옥으로 이사한 이유는 그때가 한창 이북에서 아버지의 친척들이 월남하던 시기여서 그들을 위한 넓은 집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쌍림동 집 이층엔 아버지의 당숙과 사촌 동생 가족들이 살았는데 끊임없이 찾아오는 친인척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여러 집 아이들의 싸움판으로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양순이는 나보다 네 살 많았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우리 집에 데려다 놓았다고 했다. 양순이의 등엔 늘 막내 동생이 업혀 있었다. 어쩌다 동생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는 소란한 집을 피해 잽싸게 장충단 공원으로 갔다.

어느 봄날 양순이와 장충단 공원에 또 갔다. 사방에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양순이가 한 아름 따서 내 품에 안겨주었다. 바위에 앉아서 물장구를 치다가 졸음이 왔다.

“잠들면 코쟁이가 업어 간다."

양순이가 겁을 줬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다시 잠이 들었다. 양순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머, 저 봉숭아꽃 좀 봐. 저거 따다가 손톱에 물들여 줄게."

업었던 나를 길에 내려놓고 봉숭아꽃을 따기 시작한 양순이는 너무 흥분해서 집안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시선도, 우리 뒤를 살금살금 따라오는 여자의 그림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에 도착해서 대문으로 들어가자 그 여자도 씽하니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엔 마침 어머니가 계셨는데 우리가 자기네 화단의 꽃을 다 도둑질했다고 일렀다. 어머니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싸리비로 나와 양순이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양순이가 나를 덜 맞게 하려고 계속 제 몸으로 나를 감싸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낮의 일로 다투셨다. 내 얘기인 줄 알고 귀를 쫑긋 세웠는데 의외에도 포커스가 양순이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 애에게 그렇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노기를 애써 누른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하긴 나도 평소의 어머니답지 않게 양순이를 내려치는 손길에서 미움의 그림자를 보았다. 얼마 후 양순이는 강경 집으로 보내졌다. 나는 양순이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동란이 나기 전에는 우리 논도 꽤 있었다는 비옥한 논산평야를 끼고 이 고장에는 옛날부터 정미소가 많았다. 양순이의 외삼촌은 읍내에서도 이름난 정미소를 하고 있어 명절엔 원근에서 찾아왔었다고 하는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읍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늦가을 해는 서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논산 쪽으로 돌아 나오다가 도로변에 있는 작은 정미소를 발견했다. 초라하고 쇠락한 건물이었는데 뜻밖에도 안에서는 방아 벨트가 돌아가고 있었다.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이웃에 살던 양순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중장비 기사에게 시집갔다가 첫아이를 낳고 세상을 떴다고 했다.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정미소 주인의 말이 내 귀를 때렸다.

“난리나기 전엔 가끔 서울서 키 큰 신사 양반이 찾아 오셨었지요.”

‘그분이 혹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양순이의 어머니는 정말 아버지의 여인이었을까?’

어두워진 고속도로를 서울을 향해 달렸다. 중절모를 멋지게 쓰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