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박유니스

 

그 해의 신록은 찬란했다.

푸르고 싱그러운 봄과 더불어 내 인생도 한 단계 도약하고 있었다.   그해, 나는 칙칙한 고등학교 교복을 벗고 새로 맞춰 입은 옷깃에 소원하던 대학의 배지를 달았다. 코발트 색 원피스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세상이 온통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설렘 가운데 첫 학기를 보내고 가을이 찾아왔다. 캠퍼스에 전에 못 보던 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복학생들이었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던 ,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대학신문 기자라고 자기소개를 하며 신문에 실을 글을 한 편 써 달라고 했다. 희성인 그의 라스트 네임을 듣자 초면인데도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이 사람은 드미(반쪽)라는 ?’

내 생각을 짐작한 것일까? 그가 일격했다.

“그 쪽은 샹부르(방)면서 뭘…….”

그는 내 이름은 물론 신상파악도 거의 끝내 놓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 오후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오면 어김없이 그의 엽서가 도착해 있었다.

“토요일 오후 두 시부터 디쉐네에 있겠습니다. 안 나오시면 문 닫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얼마 뒤 그는 대학신문 학생 편집장에 임명되었다. 지면에 그의 글이 자주 올라 왔다. 아름답고 힘이 있는 글 이었다. 무르익은 지성과 감성이 수려한 문장과 어우러져 빛이 났다. 어느새 그의 글이 실리는 신문이 발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내 글의 원고료를 그가 건네는 날에는 내가 커피를 샀다. 르네상스에서 리스트의 <항가리안 랩소디>를 신청해 들으며 그가 <서시>를, 나는 뮈세를 나직하게 읊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죽거든 무덤가에 한 그루 버드나무를 심어주오.

그 부드러운 낙엽들과 내가 잠든 땅 위를 덮은 가벼운 그늘을 나는 사랑할 것이오.“

 

4.19 혁명과 연이은 5.16 쿠데타로  캠퍼스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동숭동 교정의 마로니에는 철 따라 잎이 넓어졌다가 다시 떨어져 땅에 쌓이곤 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과도 흡사 했다. 울분하고 사자후를 토하다가 때론 심각하게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다가 급히 절망의 늪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젊은 우리가 개입한다고 해서 이 소란한 시절이 눈곱만큼도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무기력이라는 밧줄에 칭칭 묶여 버린 나날이었다.

 

졸업하던 해의 여름방학을 앞두고, P 시의 집으로 내려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저녁 늦게 후암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산 길을 걸으며 나와 장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첫 고백을 들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 여름에 내가 있던 P 시로 그는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빨리 9월이 오기를 열심히 기다리고 있소. 가을이 오고 그리고 샹부르가 올 것이기 때문에.”

 

9월 학기가 개강해서 캠퍼스에서 그를 다시 만났지만 더는 전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졸업 후에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고 적지 않은 나이였던 그에겐 취업이며 결혼 등이 당면한 문제였다. 나의 장래에 대한 꿈과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영원한 평행선을 그었다.

 

30여 년이 지나고 어느 해 10월, 서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모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머리가 조금 벗어진 그가 낯익은 미소를 띠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랜 외국 생활 때문만이었을까. 수십 년 전의 추억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나는 곧 그와 친근하고 풍성한 대화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헤어질 때, 그는 숙소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차를 맡기고 그가 호텔 로비로 걸어 들어 왔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탔던 사람들이 다 내리자 그가 문득 손을 내밀었다.

“오 르봐 마드무아젤(안녕, 아가씨)!”

엷은 미소를 머금은 그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문은 묵묵히, 속절없이 닫혔다.

 

몇 년 후 그의 부음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헤어졌다. 번은 미래에 대한 욕망이 우리를 갈라놓았고, 두 번째의 만남은 도덕과 사회규범이 막았고 그리고 세 번째, 우리는 천상과 지상으로 헤어졌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나를 몹시 보고 싶어 했다는 소식을 뒷날 전해 들었다. 이별은 반복해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재미수필 1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