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산책

                                                                               신순희

 

걸음만 빨리 걷자. 새해라고 특별히 계획 세우지 않는다. 꼼꼼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벅차도록 마음과 달리 몸은 느리다. 시간이 빨리 가는 아니라 시간에 비례해서 나의 대응이 느리다. 알면서도 움직이는 더딘 어쩌랴.
 

걸어가야 한다. 운동화 신고도 뛰면 된다. 느긋하게 걸어가야 한다. 이제는 뒤에 서서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도 성급함이 앞서지만 차근하게 마음 조아려서 상대를 푸근하게 해주자. 나이 든다는 무언가. 젊은이 앞세우고 뒤에서 밀어주리라.
 

어른이라고 가운데 자리 앉아서 매사 앞장서고 가르치려 하면 된다. 먼저 살아 선생(先生) 것처럼 먼저 살았으니 더욱 겸손해져야지. 목소리 낮추어야겠다. 여자가 나이 들면 때를 가리지 않고 박장대소할 있다. 모른 뜨거운 질문도 직설적으로 던지고 본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주책없다 하지. 가릴 가리고 내놓을 내놓는 여자다움은 나이와 상관없거늘. 여자의 조상은 나뭇잎으로 수줍게 가린 이브 아닌가.
 

지난번, 핸드폰 가맹점 가서 핸드폰 바꿨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 충전이 돼서다. 매장 직원은 이런 구형 전화기 남았다며 준다. 이것이 고장나면 앞으로는 어쩔 없이 스마트폰 사용해야 한다고 엄포 놓는다. 불공평하다. 원하지 않는데도 품절 신제품을 구해야 한다니. 구식이 좋은데 어쩌지? 새로운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는 건데. 백세 시대니 아직 많거늘. 새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술은 부대에그러니까 묵은 술은 낡은 부대에 담아야 한다. 포도주는 충분히 발효     될수록 좋다. 골동품은 오래될수록 명품이다. 음악을 듣는데 요즘 카세트테이프도 아니고 다시 LP 인기다. 유행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고 아래 새것은 하나도 없거늘. 오늘 새로운 다짐 하더라도 여전히 구관이 명관이다. 새해와 묵은해가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지혜다.
 

데자뷔. 가끔 지금 순간이 언젠가 있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고 꿈에서 보았던가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있다. 어디선가 듯한 얼굴과 주변 상황에 아련한 무엇인가 있을 같은 기이한 느낌, 그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 아닐까.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거슬러 올라가면 이브인 것처럼.
 

이브는 지금도 살아 있다. 돋보기 썼던지 썼던지, 쪘던지 말랐던지, 목소리 크든지 말든지, 모든 여자는 유혹에 약한 이브다. 장미는 아니더라도 할미꽃이 되지는 않아야겠다. 영화관 가서 로맨스 영화 보고 가슴 설레며, 진실 파헤치는 소설 읽고 눈물 흘리고 싶다나의 딸과 천천히 산책해야겠다. 시간이 빨리 흘러도 아직 시간 많다. 조금 느리게 걸으면 어떠랴. 앞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2015 1]

--시애틀 중앙일보 201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