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이 많다.

 

                                                                                                신순희

 

 

저건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거였어. 저건 결혼하고 처음으로 산 거야. 나도 대단해, 저걸 미국까지 가지고 왔다니. 일 인당 두 개씩 짐을 부칠 수 있어 이민 가방 여덟 개에 꾹꾹 눌러 담아 왔다. 고국을 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메이드 코리아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이 많다. 한창 유행이었던 한 자 길이의 괘종시계가 있다. 결혼하고 두어 달 만에 산 거니까 올해로 몇 년 째더라. 35년인가. 모양만 괘종시계지 추는 폼으로 달려있다. 추억을 걸어두고 있는 건 아닌지. 서울 아현동 고가구점에서 산 갓통과 머릿장은 그 시절 그런 것 처럼 ‘메이드 인 코리아’다. 그 소품 두 점은 미국 오기 전 언니네 집에 맡겼던 것을, 언니가 시애틀을 방문하던 해에 가지고 왔다. 내가 가끔 맡겨놓은 고가구의 안부를 물었더니 귀찮다며 그 커다란 짐을 고생스럽게 가져왔다. 고국을 홀가분하게 떠나오지 못했다. 이따금 남에게 줘버린 문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두고 온 물건에 대한 미련은 욕심인지 향수인지 모르겠다.

 

신사임당도 태극기도
 

이민 가방 쌀 때 뭐 그리 소중한 것이라고 나는 옻칠한 팔각 소반과 벽걸이 시계 두 개를 넣어왔다. 미국에서도 시간은 한국제품으로 재야 할 것 같았다. 싸구려 도자기 그릇, 스테인리스 스틸 7첩 반상기, 시집올 때 해온 명주 솜이불도 챙겨왔다. 볼 때마다 지금도 잘 가지고 왔다고 흐뭇해 하는 건 신사임당의 ‘초충도’ 탁본이다. 오래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구매했다. 심심하면 한 번씩 그 그림을 들여다보는데, 고국의 냄새가 난다. 그림 속 까칠한 오이는 싱싱하고 긴 다리의 귀뚜라미는 곧 튀어 오를 듯하다. 신사임당을 어찌 경애하지 않을 수 있으리. 자랑스러운 한국의 여인상이다.
 

또 있다.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는 보자기만 한 태극기와 화투와 윷. 이민 오면서 제일 먼저 챙겼다. 화투 칠 줄 모르지만, 그것이 고국의 정서 같아서 가지고 왔다. 아직 나는 그 커다란 태극기를 집안에다 펼쳐 걸지는 못하겠다. 대신 손에 들고 흔드는 작은 태극기는 성조기와 함께 거실 한쪽 병에 꽂혀있다. 이제는 함께 가는 길이다.

 

미제 식탁에서 밥을 고집한다
 

미국 와서 처음 사들인 가구들이 붙박이같이 자리 잡고 있다. 20여 년 넘었다. 도무지 망가지지 않으니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식탁만 해도 그렇다. 타원형의 8인용 식탁을 들여놓고 싶어도, 지금도 멀쩡한 식탁을 버릴 수 없다. 이 식탁은 6인용치고 넉넉하고 튼튼하다. 모양은 없지만, 앞으로도 몇십 년은 거뜬히 쓸 것 같다. 오래된 가구는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한다.
 

밥만 하고 보온이 안 되는 작은 밥솥도 있다. 커다란 보온 밥솥도 있지만 나는 이 작은 밥솥이 마음에 든다. 밥이 빨리 되고 잘된다. 가벼운 뚜껑을 여러 번 떨어트려 꼭지 한 귀퉁이가 깨졌지만, 성능은 최고다. 이건 한 17년 됐나? 난 아직도 압력밥솥을 모른다. 다음에 밥솥을 사게 된다면 아마도 말하는 밥솥이 될 것이다. 밥솥이 한국말을 한다니 밥 퍼 주시던 엄마 생각나겠다.

 

어디에 살던 마음은 하나
 

턴테이블이 달린 전축은 무슨 기금마련 가라지 세일에서 구입했다. 처음에는 잘 되던 라디오가 성능을 잃었지만, 레코드판은 잘 돌아간다. 마음이 울적할 때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크게 틀면 속이 후련하다. 조용필이 부른 ‘한오백년’도 시원하게 속이 풀린다. 어떤 땐 록 뮤직이나 판소리나 비슷하다. 반대 방향에 있는 동과 서도 통하는 데가 있다.
 

이민 오기전 언니네 집에 얼마 되지 않는 책을 맡겼는데 다시 가서 보니 지하실에 보관해서인지 책에 곰팡이가 슬고 눅눅해져 망가졌다. 이미륵이 독일에서 써내려간 수필집 ‘압록강은 흐른다’는 눈물을 머금고 버렸고, 박인환의 시집 ‘목마와 숙녀’ 는 시애틀 집으로 가져와 햇볕에 몇 날을 말린 뒤 누렇게 얼룩진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 그 옛날 박인환 시인이 시애틀에 와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시를 읊었을 줄이야.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것은, 미국 와서 살다 처음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남편이 가져온 물건이다. 언니네 집에 맡긴 짐 중 가져올 수 있는 건 가지고 오라고 시켰더니, 남편은 안에 뭐가 있는 지 열어보지도 않고 수저통만 한 묵직한 깡통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망치와 팬치 같은 공구가 들어있었다. 지금 같으면 입국하는 공항 검색대에서 무기 소유죄로 걸렸을 지 모른다. 변치않는 쇳덩어리까지 미국을 쫓아왔다. 묵직하고 끈질긴 인연이다.

 

결국은 어머니
 

이리저리 살펴보면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이 아직 더 있다. 한국에서 가져온 한복이 30년 넘었고 금강제화 구두 몇 켤레와 구슬 백이 있다. 옷 몇 벌은 내가 살이 쪘다 말랐다 하면서 입었다 못 입었다 하니 버리지 못하고 살 빠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미국에서 산 옷은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실용적이고 편하다. 한국산 옷보다 미국 스타일이 편하다니 나도 변하긴 했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구닥다리만 손에 꼭 쥐고 있는 건 아닌지, 아직도 고국을 떠나던 날의 기억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태평양 건너 어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나 보다. 이제 뚜껑을 ‘탁’하고 닫는 휴대폰을 ‘카톡’하고 말하는 스마트폰으로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2015년 4월]


--재미수필 제20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