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민이요 이름은 들레 

 

 

신순희

 

 

내가 아는 사람의 딸 이름이 민들레이다. 성은 민이요 이름은 들레. 그때 든 생각은 하필이면 밟아도 밟아도 다시 일어선다는 잡초를 곱고 귀한 딸 이름으로 지었을까, 였다.

 

한국에 살 때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 바깥 어디선가 구해온 민들레를 클로버와 함께 긴 화분에 심고 열심히 물을 준 적이 있다. 정성과 무관하게 끝내 풀꽃은 맥 없이 줄기가 휘어지며 시들고 말았다. 야생을 집안으로 들여 놓았으니 나도 참 안 될 일을 무리하게 했다. 나 혼자 보자고 욕심을 내다 공연히 풀의 생명만 빼앗아 버렸으니.

 

미국에 와서 처음 내 집을 장만하고 넓은 마당을 바라보며 흐믓해 했다. 봄이 되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잔디밭이며 꽃밭이며 구석구석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온통 민들레가 자리를 잡고 피기 시작했다. 이웃이 조언하길 손으로 뽑는 수밖에 없다고. 그 말을 믿고 나는 하루에 두 시간씩 꼬박 그 풀꽃을 뿌리까지 뽑는 데 소비했다. 뽑아도 뽑아도 근절되지 않는 민들레여.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노란 동그라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옛날, 오랜 시간 배 타고 난 뒤 잠자리에 누우면 몸이 흔들리던 것처럼.

 

이듬해부터는 엤다 모르겠다, 농약을 시원하게 뿌렸다. 내가 무슨 수로 그 많은 수를 당해 내겠느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웃집 잔디가 그리 푸른 이유는 농약 때문인 것을. 한결 수월해졌지만, 근절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꽃은 피고 또 피었다. 한때는 아파트 베란다에 모셔두고 보던 꽃이었다. 어린 시절, 하얀 씨앗을 ‘후’ 불고 놀던 풀, 들판에 가득 모이면 병아리같이 오글거리던 꽃.

 

산책길 지나다가 민들레를 보면 뽑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잠시 뒤뜰에 나서다 눈에 띄면 내 손에 뽑히고 마는 신세다. 여기저기 퍼질까 봐 급한 대로 꽃 목을 똑 따버리거나 봉오리를 아예 떼거나 솜털 사탕 같은 씨앗을 조심스레 손안에 쥐어 눌러버린다. 누군가는 그 보드라운 하얀 씨앗을 라이터 불로 지진다더라. 인간 참 모질다.

 

잔디밭 말고도 화단에까지 침투해 핀다. 보라색 화초 옆 민들레는 색 조화가 환상적이다. 차마 뽑지 못하겠다. 그래, 너희도 좀 살아야 하지 않겠니. 장미만 꽃이더냐. 장미도 야생인 것을 개량해 귀한 대접 받는 꽃이 된 것을. 민들레를 품종 개량해보면 얼마나 좋을까. 따지고 보면 얼마나 예쁜 데. 쓸모는 또 어떻고. 뿌리는 약초로 쓰이고 김치를 담그면 별미인 데다 볶아서 말렸다 가루 내면 커피 향이 난다. 차로 마시면 위장에도 좋다는데. 두어 해 민들레차를 만들어 보았지만, 우리 집에서 나만 마신다.

 

연 이파리는 쌈 싸 먹으면 쌉싸름하고 괜찮다. 독일에 살던 인형작가 김영희가 고국을 생각하며 민들레 쌈을 자주 먹었다는 글을 읽은 게 생각나 나도 고국을 생각하며 먹었다. 식탁에 내놓으면 이것도 나만 먹는다. 다른 식구들은 초고추장에 무친 나물이라야 그나마 한 젓가락 든다. 우리 집을 들락거리는 야생토끼는 없어서 못 먹던데. 인간의 입맛 참 까다롭다.

 

한국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민들레, 미국에서 실컷 보고 뽑고 먹고 나머지는 마당에 그냥 둔다. 약을 뿌리지만 시애틀의 아리송한 날씨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또다시 돋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며 미안해하며 그래 우리 함께 살자, 이제는. 네 이름이 민들레 아니냐. 낮게 피는 민초로다. 짓밟혀도 일어서고 뽑아내도 다시 돋아나는 풀꽃. 어디서든 뿌리 내리는 곳이 나의 자리다. 낮은 데로 내려와 피지만 씨앗은 멀리 희망으로 날아간다. 그 꽃말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떠돌다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아니냐. 감사한 생명이다.

 

딸 이름을 민들레라고 지은 그 사람은 어디서나 피어나는 이 들꽃이 생명의 근원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2016년 9월]


--재미수필 제19집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