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책 반납기일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고 서둘러 동네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주차하고 뛰어가는 나를 뒤에서 누가 부른다. 쌍꺼풀진 동그란 큰 눈이 선량한 인상을 주는 필리핀계 남자이다. 내가 파킹할 때 그의 차를 부딪쳤다고 한다. 나는 마치 필름이 끊긴 양,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저 놀라서 두 대의 차를 살펴보았다. 그의 말처럼 그의 차 범퍼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내 차 앞부분의 상처는 공교롭게도 몇 개월 전 밤, 수영장에서 누군가 긁어놓고 사라진 바로 그 위치라 순순히 수긍할 수도 없었다. 요즘 경제가 안 좋아 고의로 접촉사고를 내고 보상금을 요구한다는 뉴스가 기억났다. 오늘 운수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부딪치지 않았고 내 차의 흠집은 벌써 몇 달이나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자기의 새 차를 망쳐놓고 모르쇠냐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도서관에서 나와 대미지가 크다고 떠들면서 자동차 사진을 찍어댔다.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남자는 ‘방금 생긴 새로운 스크래치’라며 증인을 자처한다. 사면초가라더니 상황이 내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궁지에 몰린 쥐가 따로 없었다.

 

수 년 전 내 차가 뒤에서 받혔을 때가 생각났다. 나를 받은 차는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탓인지 동네 길에서 발생한 사고였지만 폐차했다고 들었다. 미국 온 후 처음 겪는 큰 사고라 당황한 터에 변호사를 선임하면 여러모로 편하다고 들었다. 마침 친구의 탁구교실에 교통사고 변호사가 있어서 소개를 받았다. 교통사고는 처음에 괜찮은 듯해도 나중에 후유증이 크게 올 수 있으니 병원에 다닐 것을 권했다. 보험회사에서 오는 전화에 일일이 응대할 필요도 없고 병원도 내가 원하는 곳을 마음껏 다닐 수 있게 해주니 편리했다. 일주일에 세 번 씩 병원에 갔는데 2주가 지나니 몸도 좋아지고 시간 내기도 힘들었다. 보상금을 많이 받으려면 치료를 오래 받아야 한다고 은근히 권하는 눈치였으나 그만 두었다. 앞으로 이번 사고로 인한 추가 치료를 포기한다는 서류에 서명하고 보상금으로 500달러까지 받으니 로또 맞은 양 친구들에게 밥을 사기도 했는데, 오늘 그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가 싶었다.

 

얼른 이 난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경우 기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우선 내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하며 손으로 그의 차 범퍼를 닦아 보았다. 범퍼에 묻은 페인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험으로 처리하기 원하는지 아니면 바디샵에 가서 직접 고치기를 원하는가 묻자, 미안한 줄 알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보상보다 나의 사과를 원했었나 보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선량해 보이는 큰 눈을 껌벅이며 타는데 지장 없으니 그냥 가보란다. 무엇에 홀린 듯 얼떨떨했으나 어쨌든 살았다 싶었다. 가방에서 200달러를 꺼내 가족끼리 점심이라도 사먹으라며 주었으나 안 받는다. 그의 딸에게 억지로 쥐어주었다.

 

전화번호라도 줄까 하다가 혹시 그가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싶어 냉큼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쿨 하게 나를 보내주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훗날 이런 경우가 혹시 내게 생긴다면 오늘의 그 남자처럼 타는 데 지장 없으니 되었다며 쿨 하게 보내 줄 수 있어야 될 터인데.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좋은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을 실감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반전이었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6/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