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사과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막내삼촌의 외아들이 목사안수를 받고 개척교회를 시작했단다. 오랫동안 내 가슴을 누르던 묵직한 돌덩이가 치워진 느낌이다. 엄마는 신혼 초부터 여중생이던 고모를 떠맡아 약대에 보내고 결혼시킬 때까지 십 여 년 시누이 시집살이를 했다. 게다가 큰아버지의 부도를 막느라 집을 파는 등 시집과는 앙금이 많았다. 평택선산에 당신의 묏자리가 있어도 죽어서까지 최 씨와 나란히 누워있기 싫다고 농담처럼 말씀하곤 했으나 나이 들며 시집식구들과 화해하고 가끔 소식을 전하신다.

 

평택은 이제 시로 승격하였지만 내가 어릴 때 만해도 시외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가야했다. 버스는 정거장마다 서며 농부들의 짐을 실어 나르는 역할도 했기에 도착시간을 가늠키 어려웠다. 명절이면 하루 일찍 가서 고릿한 메주냄새가 나는 방에서 며칠을 자야했는데, 서울에서만 자란 내게 그것은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만석꾼으로 불리던 친할아버지는 땅욕심과 함께 자식욕심도 많아 아홉 자녀를 두었다. 막내인 승현이 삼촌은 어려서 뇌성마비를 앓았다. 태어날 때 시골에서 산파잘못으로 뇌에 산소가 부족해져서 운동기능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지능은 정상이라고 들었다.

 

마당의 분주한 소리에 잠을 깬다. 제대 후 농사일을 거들던 셋째삼촌은 작두로 짚을 썰어 김이 펄펄 나는 무쇠솥에 연신 넣어가며 쇠죽을 쑨다. 할머니는 마당의 우물가에 앉아 갓 잡은 닭의 털을 뽑고, 주변엔 목숨을 부지한 여러 마리 닭들이 파닥거리며 바삐 돌아다닌다.

 

막내 삼촌은 집에서 만든 유과와 엿, 그리고 아직 붉게 물들기 전 연둣빛 아삭한 대추를 내게 챙겨주었다. 숱 많은 고수머리와 짙은 눈썹 아래 깊게 쌍꺼풀진 눈이 인상적인 그는 집안 남자들 중에서 제일 미남자이지만, 말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을 찡그리고 침을 흘리기 일수였다. 불편한 몸 때문에 농사일을 거들지 않아도 되는 그는 서울에서 온 조카를 돌볼 책임이 주어졌다. 우리는 과수원구경을 한 후 바다를 보기위해 한참을 걸어 야산에 도착하였다. 우수에 찬 그의 눈이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농사일이 싫어 중학교 때 상경한 내 아버지처럼 그도 서울로 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저 멀리 보이는 큰 배를 타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외국으로 떠나고 싶었을까.

 

의지할 곳을 찾아 그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작은 형님, 형수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에는 ‘최승현 나사로 올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비뚤비뚤 쓴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성경구절 인용과 한자어가 많이 섞인 지루한 만연체 편지였으나 상경하여 신학교에 다니고 싶다던 그의 소망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경제적 도움을 주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순복음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으면 여의도에 사는 우리 집에서 여러 날 묵었으며 나사로 전도사를 찾는 전화도 여러 차례 걸려왔다.

 

그날, 학교가 파하고 나는 장미분식으로 친구들과 쫄면이랑 팥빙수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누가 뒤에서 ‘숙희야’ 하고 불러서 뒤를 힐끗 돌아다보니 한쪽 발을 질질 끌면서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삼촌이 있었다. 성경책과 옷가지가 들어 있을 큰 가방과 시골에서 가져온 먹거리보따리를 힘겹게 들고 있었다. 한강변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집인 장미아파트를 향해 걸어오다가 나를 본 것이다. 뜨거운 한여름 날씨와 무거운 짐으로 땀 범벅이된 뇌성마비 삼촌이 부끄러웠다. 얼른 달려가서 삼촌의 짐을 들고 집으로 같이 가는 대신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장미분식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날 일은 나의 비밀이 되었고 곧 잊어버렸다. 어쩌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 눈에 띄면 삼촌을 생각했고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이 불편했다.

 

낮에 마주친 일을 삼촌이 발설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저녁을 먹은 후 평소처럼 내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시골에서 가져온 수수부꾸미의 기름기를 냅킨으로 천천히 닦아내며 한입씩 베어 먹으며 어른들 말참견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삼촌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며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여배우 태현실과 김지미를 반반씩 섞은 듯한 정갈한 여인의 사진이었다. 결혼얘기도 놀라운 일이었으나, 사진의 주인공이 너무도 반듯하게 생긴 미인인 것이 더욱 놀라웠다. 순복음교회에서 만났는데 그쪽 집안에는 벌써 인사를 다녀왔으며, 형님이 허락하면 수일 내로 같이 오겠다고 했다. 더불어 자기는 그녀의 고향인 충청도로 내려가 묘목사업을 할 계획이고 평택의 자기몫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요지였다. 아무리 신앙 속에서 만났다지만 멀쩡한 미인이 뇌성마비 삼촌과 결혼하겠다는데 모두들 쉽사리 찬성하기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하고 충청도로 갔다.

 

숙모가 처음 집에 인사 왔을 때를 기억한다. 요즘처럼 박스포장이 없던 시절이라 양회 봉투에 넣어온 홍시중 몇 개가 서로 부딪혀 터져 있었다. 과일을 양회 봉투에 넣어 주었다고 타박하던 엄마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삼촌의 외형적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믿었기에 결혼당시 수군거리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에도 놀랍도록 의연함을 보였겠지. 얼마나 큰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결혼생활이 얼마나 오래 가겠냐는 염려를 불식시키고 일가를 이루어준 숙모가 고맙다.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고, 목회자가 되고싶어하던 삼촌의 오랜 소망을 아들을 통해 이루었으니 감동적이다. 내년에 한국에 나가면, 늦었지만 삼촌을 꼭 만나 어린 날의 철없던 일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