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머 리카르도

 

유난히 잦은 목욕과 샤워를 즐기는 아들애는 제 누나가 대학으로 떠난 뒤 집안의 온 목욕탕을 돌아가며 어지럽힌다.  뭐든 아까운거  모르는 전형적인 요즘아이로, 양치질하며 물도 마냥 틀어놓기 일쑤고, 집을 호텔로 아는지 타월도 한 번에 몇 개씩 쓰고 한 번 쓴 건 다 세탁 바구니에 던져 놓는다.  전생에 물오리였는지 아침에 눈뜨면 샤워, 방과 후 집에 오면 크로스컨트리를 하고 와서 땀 흘렸으니 장시간의 목욕, 또 자기 전에 샤워다.  목욕탕 청소와 빨래를 당해내기 힘들어 살살 달래서 안방 목욕탕 하나만 쓰게 했다.  아들애가 쓴 타월을 샤워장 문에 걸쳐 말린 후 우리부부가 다시 쓰는 경우도 많았다. 집 떠나 기숙사가서 제 손으로 빨래해 보면 고쳐지겠지 하고 내버려 두었다.  스마트폰까지  갖다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큰 월풀 욕조에서 목욕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하고 큰소리로 부르기에 가보니 욕조위에 달린 J자형의 큰 수도꼭지가 부러져 있었다. 아마도 탕에서 나올 때 수도꼭지를 잡고 나오다 보니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져 그리된 것 같았다. 3년 밖에 안 된 새집인데 기가 막혔다. 상표는 MOEN 이라는 유명한 것인데 중국제라 약한가 하며 화를 냈다.

 

미국 온 후 인건비 아끼느라 10년 넘는 세월동안 집 안팎의 온갖 고장 손보던 남편도 뾰족한 수가 없는지 플러머를 부르란다. 연수기의 소금기 탓으로 광택을 잃은 부엌 수도도 갈고 싶었다. 한번 사람 불러 두 가지 일을 보면 인건비를 절약하니 오히려 돈을 버는 셈이라고 부엌수도는 샀는데 문제는 욕조의 수도였다.  홈디포 직원 말이 커스텀 메이드  같다며 본사에 연락해 보란다.  웹사이트에서 간신히 비슷한 것을 찾아 사정을 설명했더니 모든 부품은 공짜로 보내준단다.  중국제라고 탓하던 마음은  금세 풀어지고 한번 판매한 제품에 대한 회사의 라이프타임 책임감에 감동하며 “역시 브랜드를 써야해” 한다. 사람이 참 간사한 동물이다.

 

두 명의 플러머가 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던 중 리카르도를 소개받았다. 미군에 오래 근무했다는 그는 군복 차림에 곱슬 거리는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뒤 베레모를 썼다. 카이저수염을 길렀는데 호탕히 웃는 모습이 낙천적인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상황을 보더니 'no problem'한다.  부품이 크기가 맞는 것은 아니나 자른 후 용접하여 맞는 부품으로 만들어 고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맘에 들었다. 그의 큰 딸이 스탠포드 법대에 다니고 지난여름 큰 법률회사에서 인턴을 했으며 멕시칸을 위한 무료 법률자문 자원봉사를 한다는 말에 입이 벌어졌다. 내가 온갖 정성을 다하는 아들애가 감히 원서도 쓸까 말까한 어려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누구든 공평히 대해야 한다고 믿고,  한인 중 <맥작>이란 용어를 쓰며 남미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면 속으로 경멸해 왔는데 나 자신도 그 부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을 권하니 한국음식 좋아한다며 사양도 않는다.  육개장에 밥을 말아 김을 얹어 먹는데 신기했다.

 

다음날  조수와 함께 와서 한 시간쯤 일 하고 조수가 배가 고프다며 음식을 달라기에, 고등어 김치조림밖에 없다 하니 원래 고등어 좋아하여 레돈도비치에서 낚시도 하니 나중에 잡으면 갖다 주겠단다.  두어 시간 일한 후 부품을 사러 가야 한다며 나간 후 해질녘이 되서야 나타났다. 근처 홈디포에는 없는 것이 많다고 투덜대며 세 군데를 들른 후에야  간신히 구했다더니, 늦어서 내일 오겠다고 가버렸다.  

 

그 다음날엔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게 오더니 어느새 밥 때가 되어 간장 떡볶이를 해주었다. 부엌 수도에 쓸 실리콘 살 것을 깜박하여 나갔다 온다더니 또 함흥차사다. 소개해준 이에게 들으니  우리 집 일과 다른 집 일을 동시에 하느라 왔다 갔다 해서 그럴 거라고 한다. 일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이 있을 때 양쪽일을 맡아 왔다갔다 하며라도 해야 한 푼이라도 더 벌수 있기 때문 이란다. 멕시코 Guadalahara에 아내와 세 딸이 있어 돈 부치느라 아끼느라고 차에서 자고  코인 라운더리로 출근하여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한단다.  집 밥을 못 먹은 지 오래되어 염치불구하고 밥을 찾았나본데, 밥 시중이 귀찮아 다음부턴 라면 줄 생각으로 신라면 사다 놓은 게 맘에 걸린다. 아주 기본적인 생활의 편의도 없이 지내는 것이 안타깝다.  무슨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사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루 빨리 리카르도 가족이 함께 살게 되기를 바란다.   

 

매사에 돌다리도 두들기는 꼼꼼한 성격의 남편은 리카르도의 작업이 못미더운지 수시로 들여다보고 질문을 하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일로 걱정하는 남편을 인생의 선배로서 타이르는 듯하다.  서로 처한 상황은 다를지라도 고단한 이민 가장으로서의 감당은 리카르도나 남편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갱년기에 접어들었는지 부쩍 조급증을 내며 짜증내는  남편과  가진 것 없어도 낙천적으로 생활하는 리카르도가 대비된다. 우리는 대체로 빠르고 확실한 결과를 원하여 과정의 행복을 희생해도 결과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하는 경향이 있으나. 멕시칸들은 결과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즐기며 과정을 중요시 하는 것 같다. 서로의  다른 점을 보완하면 좋겠다.  두 이민가장에게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일을 끝낸 후 그동안 밥 잘 먹었다며 <나이스 쿡> 이라고 칭찬하더니 실리콘 남은걸 선물이라며 준다.  <GE premium waterproof silicone moldfree> 라야 싱크에 물때가 안 낀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