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미안해

 

잠자는 딸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엄마?"

아이의 목소리에서 불안함과 해방감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얼른 자야 내일 일찍 일어나지."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딸과 6개월을 같이 지냈다. 멀리서 학교에 다녀 일 년에 고작 두서너  번 밖에 못 보아 항상 그립던 딸 이었는데, 속 마음과는 달리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대공항 이후 가장 길고 심각한 경기침체로 취업난이 심하다 했다.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져 감원의 칼바람이 거세져서 부모에게 얹혀사는 캥거루족 어른아이가 늘어난다 해도, 내 아이는 예외라고 믿었다. 방학이면 뉴욕과 LA의 큰 회사에서 인턴을 했으니까,  좋은 학교를 나왔으니까, 하면서 타당한 이유를 찾았다. 취직하면 시간내기 힘들것 같아 졸업 축하 여행도 일찌감치 다녀왔다.  아이는 내가 이름도 모르는 수 많은 회사에 지원하고, 지루한 여러 단계의 시험과 면접을 치룬 후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척하는 아이를 지켜보기 힘들었다. 기회를 주면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잘 할 아이인데 인재를 몰라주는 회사가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내가 예상한 아이의 타임라인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무력감과 멍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아이의 영어가 부족하여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되었다. 영어가 많이 필요치 않을듯하여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콩쿠르에 나가 악보를 잊었는지 연주를 갑자기 멈추었다. 실력도 안 되는 아이를 너무 밀어 붙였나 싶어 후회하며 초조해하는데, 딸은 태연히 다시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고 곡을 마쳤다. 비록 등수에는 못 들었지만, 차분히 다시 시작하는 아이의 배짱이 놀랍고 대견했다. 아이 때문에 속상할 때면 그때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달래곤 했는데, 요즘이 그러하다.

 

왜 그리 조바심을 냈던가.  노는 꼴은 못 보겠으니 대학원에라도 가라고 했다. 윤나게 살림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긴 머리카락만보면 머리 단정히 못하냐고 아이에게 잔소리했다. 유튜브에서 보고 목도리와 모자를 근사하게 뜨는 아이에게 그런 한가한 시간 있으면 회사 하나라도 더 찾아보라 하고, 한식당에서 먹어 본 갓김치와 깻잎장아찌를 그럴싸하게 만들어도 칭찬하기 싫었다.  늦잠 잔다고, 편식한다고, 운동 안 한다고, 머리 안 자른다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옷 입는다고 트집을 잡았다. 묵묵히 참으며 끝까지 언성 한번 높이지 않은 아이의 인내심에 놀랐다.  

 

딸아이와 동갑인 조카가 아이비 대학을 나와 졸업과 동시에 JP Morgan에 취직한 소식에 초조해졌다. 비교와 채근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평범한 엄마인 내게 극도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극심한 불황으로 일자리를 아예 구하지 못하거나 학력 이하의 일을 하는 젊은이가 늘어간다는 신문기사를 읽을 때마다 아이의 눈치를 보았다. 드디어 내일 아침이면 광고회사 일자리를 찾아 뉴욕에 간단다. 할렐루야. 

 

의젓하게, 어른답지 못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다며 실상은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었다.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의 걸음을 걸어라. 네가 독특하다는 걸 믿어라. 너만의 색깔과 개성을 찾아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서지 말고 자기 길을 가라' 했지만, 말 뿐이었지 아이 혼자 엉뚱한 낯선 길에서 헤맬까 걱정하고 초조해했다.

 

학생으로 떨어져 있는 것과 사회인으로 집을 떠나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온실에서 키워 대가리가 노란 <콩나물>을 만들기보단 드넓은 세상으로 보내어 푸르른 <콩나무>로 키워야지. 이제 집을 떠나 강렬한 햇볕을 쬐며 싱싱한 초록의 큰 나무로 크렴. 이제까지 힘 든것은 큰 나무로 크기위한 자양분이될 거야.  엄마가 심한 말하고 스트레스 준 것 미안해. 뜨거운 담금질 후 더욱 강한 쇠가 되듯이, 비온뒤 땅이 더욱 굳듯이,  그간 겪은 실패와 시련을 통해 더욱 굳센 마음을 갖게 되기를.  눈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그 시간들이 결코 헛되진 않을 거야. 뿌리를 튼튼히 할 시간이었기를.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될 너를 기대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