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갱년기

  내가 알기로 가장 고루한 직장인 은행에 수 십 년 다니신 친정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손 하나 까딱 안하셨다. 전화벨이 아무리 울려도 절대로 먼저 받는 법이 없어서 김치 버무리던 엄마가 손을 씻고 달려와 받을 정도였다. 물을 마시려면 안방이나 거실에서, “나 물 좀 주지.” 하시지 부엌에 결코 들어가는 법은 없었다. 못 박기, 방바닥 니스칠, 가전제품 연결 등 다른 집 같으면 당연히 남자들이 하는 일을 엄마가 도맡아 하셨다. 그런 분위기에서 큰 나는 결혼 후 시댁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민물 생선찌개를 좋아하시는 시아버님은 낚시로 잡아도 오시고 아는 분께 얻어도 오시곤 했는데, “네 엄만 비린내 싫어해.” 하시며 손수 싱크에서 다듬고 뒷정리도 말끔히 해 놓으셨다. 명절 때 송편이나 만두도 여자들은 재료 준비만 하면 되었고 시아버님을 중심으로 사형제가 척척해 내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어설픈 흉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솜씨였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이 맞는지, 거실과 부엌의 경계가 불분명한 작은 아파트에 살던 신혼 초부터 남편은 부엌일을 잘 도와주었다. 같이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내가 쌀 씻어 밥 안치고, 찌개나 국 을 준비하는 동안 수저도 놓고 밑반찬도 꺼내놓고 설거지를 해주었다.

미국 온 후 남편의 하는 일은 더 광범위해졌다. 주말은 쉬고 휴가도 넉넉한 직장 생활하던 한국과는 달리 개인 비즈니스를 하여 항상 시간은 빠듯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은 여자가 더 빠른지, 나는 가발과 미용재료를 판매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이민생활에서 경제적 자립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배우는 데는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양한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싫다고만 안하면 뭐든 가르치고 싶었다. 정명훈 어머니의 자서전을 읽고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있을지 모를 음악적 천재성을 놓칠까 봐 피아노, 바이올린, 클라리넷을 가르쳤다. 올림픽에서 미셸콴을 본 후로는 발레와 스케이트를 시켰다. 어린 미셀콴을 가르친 코치가 집에서 15분 거리의 스케이트장에서 아직 레슨을 하는 것을 알고 우리가 얼마나 행운인가 하며 추위에 떨며 레슨을 지켜보곤 했다. 남편은 애들을 싣고 축구장과 수영장으로 바삐 다녀주었고 딸의 발레머리를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빗겨주곤 했다.

미국 온 지 6개월 만에 IMF가 터져 당시 한국에서 송금하는 돈에 의존해 살던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는데, 그때 버릇이 남아서 아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인건비 비싼 미국이니 남편은 자동으로 만능 핸디맨이자 조립공이 되었다. 나중에 형편이 좋아져 큰집으로 옮긴 후, 청소가 힘들어 청소부를 부르려 하면 남편은 먼저 청소기를 돌리며 내 입을 막았다. 그렇던 남편이 갑자기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한다. 

 올해 만으로 51세가 된 남편, 뜬금없이 로또라도 맞으면 나에게 다 주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한다. 생명보험도 하나 들어야겠다나. 황당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론 이해도 된다. 짬짬이 가게에서 빠져나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하는 나와는 달리,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자신을 위해선 취미하나 갖지 않고 일과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한 남편이다. 불경기 탓에 일도 힘들고, 아이들도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은 아니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마누라는 한마디도 지지않는 피곤한 스타일이니, 이 남자가 많이 쓸쓸하고 외롭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 온 후, 술 담배 모두 끊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도 많이 없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갑자기 찬송가 가사가 퍼뜩 떠오른다. 

 부부란 긴 상을  같이 들고 가는 사람이라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살짝 상을 드는 척만 하고 온갖 음식 차려진 무거운 긴 상을 슈퍼맨도 아닌 남편 혼자 감당케 했나보다. 온갖 짐을 감당해 온 남편의 고생한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고 싶다. 고마웠다고, 이제 나눠지자고.

   슬픈 사람에겐/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눈으로 전하고/가끔은 손 잡아주고

   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 주어요.

갱년기가 왔는지 부쩍 우울해 하는 남편을 보는 내게, 이해인 수녀님의 이 시가 내게 반성문을 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