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곽을 닦는다. 솔로 박박 문지르니 원래의 고운 분홍빛이 살아난다. 세면대위 거울 속에는 걱정을 털어내려고 손을 바삐 움직이는 낯익은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십년 넘게 가게를 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한 기억이 없다. 내친 김에 세제를 풀어 변기를 닦고 물을 세차게 거푸 내렸다. 남편은 이민 와서 내게 가게일 시키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화장실 청소는 당연히 자기 몫이라고 했고 나도 그러려니 했다.   

 

베개를 여러 개 겹쳐서 잘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내가 무심했다. 내일 위내시경 검사를 예약했으니 금식해야 한다며 물도 못 마셨다. 속이 쓰려 주치의에게 약 처방을 받았는데 약 먹을 동안엔 괜찮다가 약을 끊으면 증세가 더 심해지니 위장 내과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받으라고 했단다. 병원에 간 남편 대신 아침 일찍 나와 가게를 열었다. 혹시라도 위암이면 어쩌나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지우려는 듯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들이 아직 제 앞가림을 할 나이도 아니고 막말로 남편은 생명보험도 없지 않은가. 결국 혼자 책임을 떠맡게 될지도 모를 내 걱정이다.

 

의료보험이 있어도 비싼 자기부담금 때문에 병원문턱이 높다지만 아픈 것을 참고 끙끙대다가 병을 키우면 어쩌려고 그랬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다행히 나이 들며 위와 식도를 연결하는 괄약근이 느슨해져서 생긴 위산 역류라는 진단을 받았다.  5,60대 성인 열 명중 한 명이 앓고 있을 정도로 흔한 질환이라는 말에 안심하다가, 관리소홀로 식도에 염증이라도 생기면 식도암으로 까지 발전될 수 있다고 하니 겁이 난다.  의사가 크리넥스나 화장지나 닦는 건 마찬가지라며 비싼 처방약 대신 오버-더-카운터 약을 권했다고 한다. 하기야 의사는 심각한 환자를 많이 보아 위산역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병에 대한 그의 가벼운 태도가 환자를 안심 시키는듯하여 위로가 되었다.

 

아이중심으로 살다가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로 떠나니 빈 둥지에 남은 어미 새 마냥 처량하고 적응이 어렵다.  “같은 사람과 너무 오래 살았나봐.” 농담조로 말을 하지만 나이 들면서 호르몬의 변화로 갱년기가 오는지 남편의 잔소리가 많아졌다. 지적질의 대마왕 이라고 별명을 지어주고 싶을 정도로 내게 대한 불만과 지적이 습관이 된듯하다. 뭐든지 “그래 네가 옳다.”하던 천사 같은 남편이 더 이상 아니다.  

 

힘들어도 힘들다 소리 못하는 가장의 입장이 위에서 신물을 올라오게 했을까. 머물러야 하는 곳을 떠난 위산은 식도를 할퀴고 상처를 남기겠지. 언어와 문화의 이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살아 내야 하는 이민의 삶. 가장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어느새 품을 떠난 아이들, 고분고분하지 않은 마누라, 가슴속은 텅 비어가는 느낌이었겠지. 끝 모를 불황의 긴 터널 속을 헤매며 상처받고 깨진 마음을 내가 위로해야겠지.

 

몇 달 전 중국 시안을 여행하며 <장한가>공연을 보았는데, 가이드가 설명해 준 비익조라는 전설상의 새가 기억에 남는다. 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 둘이 한 몸이 되어야 날 수 있다는 새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가 비익조가 되어 하늘을 나는 장면이 장예모 감독의 뛰어난 연출로 돋보이는 무대였다. 말에 항상 토 달고 깐죽대기 잘한다고 ‘깐죽이’로 불리던 내가 비익조같이 남은 생을 살자고 하면 놀래겠지. 우선 위산역류에 좋다는 양배추나 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