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다 못해 가슴이 저린 사람과 결혼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꿈일 뿐 현실은 내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성사율이 높다는 리버사이드호텔 커피숍에 나가 맞선보기에 진력이 날 때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사형제중 셋째라는 것은 시집살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던 내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얄미운 시누이도 없고 시부모를 모실 가능성이 낮다고 믿었던 게다. 중매인 터라 어느 정도 조건은 이미 맞춘 상태였고 허황됨을 알면서도 내가 항상 주장하는 그놈의 믿지 못할 '느낌'도 괜찮았다. 뿔테안경 속 크게 쌍꺼풀진 눈이 송아지의 그것을 닮아서 마음에 들었다면 누구라도 웃겠지.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호텔 종업원이 두부종 달린 작은 칠판에 이름을 써들고 말쑥한 차림새의 처녀총각들 사이를 지나가면, 화장실에서 충분히 점검했어도 작은 손거울을 꺼내어 얼굴을 몰래 들여다보곤 했다. 첫 만남에서는 한여름이라도 뜨거운 음료를 마시고 식사는 하지 말라는 엄마의 당부를 콧등으로 흘려듣는 척했지만, 커피를 시키고 배가 안 고픈 양 했다. 

 

 6개월에 상견례, 약혼식, 결혼식을 후다닥 치르니 인륜지대사를 성급히 결정했다는 비난을 피하긴 힘들다. 어느 비 오던 날 우산 하나를 나눠 쓰며 명동 거리를 걸을 때 서로의 팔이 닿을까봐 긴장했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그 당시 풋풋한 설렘은 추억 속에만 존재한다.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가족에게 헌신하는 가장의 모습은 나의 처음 '느낌'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살면서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기막혀한 적도 많다. 그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리라.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부부의 갈등은 극에 달하지만 각자 취미를 가지며 서로 덜 부딪히면서 슬기롭게 지나가나 싶었는데, 삶의 복병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 숨어있다. 

 

 복부초음파를 하다가 남편 간에서 5밀리의 혹이 발견되었다. 주치의의 권유대로 MRI를 찍고 간 전문의를 소개받아 진찰받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아도 남의 일만 같았다. 혹의 크기와 위치가 조직검사를 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두 달 후 다시 사진을 찍어보자는 의사의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져 답답했다. 건강문제에 관해선 최악의 시나리오에 매달리게 되는가 보다. 남편이 인터넷에서 간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 흔적을 보니 마음이 아리다. 힘든 이민생활 중 내뱉지 못한 울분과 아픔이 속으로 곪아 혹이 되었을까. 당신은 가장이니까 하며 희생과 양보를 강요받다 지쳤나. 가장은 부부가 함께 끌어가는 수레인데, 무거운 짐으로 얹혀 살아왔으니 혹 생긴 것이 내 탓인 듯하여 미안하다. 가엾다. 

 

 산에서 구했다는 겨우살이와 상황버섯을 얻었다. 커다란 유리냄비와 말린 무청, 표고버섯, 그리고 <야채수프 건강법>책도 선물로 받았다. 간에 좋다는 부추와 미나리 모종을 얻어 뒷마당에 심었다. 세상이 혼자 사는 듯싶어도 더불어 살아감을 느낀다. 사람의 정이 고맙다. 힘을 얻는다. 

 

 마음을 추스르고 눈물을 닦는다. 비 온 뒤에 땅이 더욱 단단해지고 공기는 신선해 지겠지. 웃자란 부추를 자르다 별같이 생긴 하얀 부추 꽃을 보았다. 어느새 까만 씨가 매달린 꽃대도 있다. 꽃대는 여느 부추와는 달리 하늘거리지 않고 꼿꼿하여 쉽게 꺾을 수 없다. 부추의 꽃대를 닮으리라.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다.  

 

 임신 중 불룩한 배로 발톱 깎기 힘들 때면 남편이 깎아주곤 했다.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건 삶의 큰 위로이다. 영어단어 Live와 Love가 철자 하나만 다를 뿐인 것처럼 살아가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지. 요즘 남편을 생각하면 어디서고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라면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 테다.